변색 렌즈
변색 렌즈
  • 이은일 수필가
  • 승인 2020.08.25 1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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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이은일 수필가
이은일 수필가

 

나는 안경잡이다. 십 대부터 근 40여 년을 잠자는 시간 외에는 안경을 쓰고 살았으니 이제는 내 몸처럼 익숙하다. 하지만, 익숙하다고 해서 불편함까지 없는 것은 아니다. 요즘은 노안(老眼)이 와서 돋보기안경까지 쓰게 되니 그림을 그리거나 책 읽을 때마다 이거 썼다 저거 썼다 여간 번거로운 게 아니다. 게다가 나이가 들면서 부쩍 심해진 건망증 탓인지 안경을 어디에 두었는지 찾아다니는 일이 잦다.
십여 년 전쯤 변색 렌즈 안경을 썼던 적이 있었다. 자외선의 양에 따라 렌즈의 색이 변하는 렌즈였다. 실내에서는 그냥 안경이지만 햇빛을 받으면 자외선 차단도 되고 렌즈 색이 까맣게 변해 선글라스가 됐다. 외출 시 따로 선글라스를 챙기지 않아도 되니까 너무 편리하고 좋아서 여러 번 안경을 바꾸면서도 계속 변색 렌즈를 고집했었다. 그런데 변색 렌즈 안경은 다 좋은데 한 가지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다. 햇빛을 받으면 금방 선글라스가 되지만 다시 안경으로 돌아오는 데는 조금 시간이 걸린다는 거였다. 간혹 중요한 행사나 점잖은 자리에 가게 되었을 때, 햇빛이 강한 야외에 있다가 실내로 들어가 얼마 동안은 굉장히 민망한 상태가 되곤 했다.
한번은 집 근처에 있는 한 초등학교에 구직서류를 접수하는데 커다란 운동장을 가로질러 가서 교무실에 서류를 내고 왔다. 나중에 들려온 말이 ‘구직하러 오면서 건방지게 떡 하니 선글라스를 끼고 왔더라.’였다. 하긴 내 기억에도 그날은 한여름 뙤약볕이 운동장을 잔뜩 달구고 있었으니 충분히 그리 생각할 만했다. 만일 그날 변색 렌즈 안경을 쓰지 않았더라면, 또는 안경알이 본래대로 돌아온 다음에 교무실로 들어갔더라면 어땠을까. 그 때문에 결과가 달라지진 않았겠지만, 안경 너머로 눈빛이 전달되었더라면 적어도 건방지다는 오해는 안 받았을 것이다.
눈을 보면 사람의 마음이 보이기도 하고 세상도 보는 것도 눈을 통해서이다. 우리나라 속담에 제 눈에 안경이라는 말이 있다. 보잘것없는 것이라도 제 마음에 들면 좋아 보인다는 말이다. 선입견이나 편견을 비유해서 색안경을 쓰고 본다는 말도 있다. 의미는 전혀 다르지만 둘 다 자기만의 렌즈로 세상을 본다는 관점에서는 일맥상통한다고 볼 수 있겠다. 똑같은 대상이라도 다른 렌즈로 보면 다 다르게 보이는 법이다. 각자의 경험에 따라, 살아온 삶의 결(?)대로 지문(指紋) 같은 렌즈를 만들고 그것을 통해서 보이는 대로 세상을 보게 되는 것이다.
수필교실에서 당번 글을 합평할 때 보면 재미있는 것이 있다. 회원마다 항상 지적하는 부분이 따로 있는 것이다. 누군가는 주로 맞춤법에 대해서, 또 누군가는 글의 구성이나 표현에 대해서 의견을 제시하곤 한다. 반복되는 단어를 잘 찾아내는 회원도 있다. 본인이 글을 쓸 때 중요하게 생각하는 분야이거나 똑같은 오류를 퇴고해 본 경험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쏟아지는 폭우 속에서 목 놓아 울어 본 사람이 상대의 깊은 슬픔을 금방 알아차리고, 동백 꽃잎처럼 아프게 떨어져 본 사람이 그 안에 번진 아픔의 빛깔로 붉어질 수 있는 법이다.
요즘에 나는 변색 렌즈 안경을 쓰지 않는다. 불필요한 오해의 소지를 두느니 조금 불편한 게 낫다는 생각이다. 하지만 마음의 눈은 부디 변색 렌즈이길 바란다. 세상 모든 빛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고성능의 만능렌즈는 아니어도, 보아야 할 것을 못 보고 지나치는 무심한 사람은 되고 싶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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