쪽빛으로 부는 바람, 천공의 우물
쪽빛으로 부는 바람, 천공의 우물
  • 안승현 청주시문화재단 문화산업1팀장
  • 승인 2020.08.25 1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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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주알 고주알
안승현 청주시문화재단 비엔날레팀장
안승현 청주시문화재단 문화산업1팀장

 

연신 땀이 흘러내린다. 정수리의 뒤에서 시작된 땀은 목 뒷덜미를 타고 등과 엉덩이로, 정수리의 앞에서 발원한 땀은 턱을 타고 가슴으로 흐른다. 다른 한 줄기, 입가로 흐르는 땀은 입 꼬리로 고인다. 처음엔 짭조름한 맛이었는데, 시간이 지나며 맹맛이다. 
얼굴에서 흐른 땀과 온몸에서 분출된 땀은 옷에 의지한다. 분출된 땀을 받아내고 머금은 속옷은 피부와 하나가 되었고, 겉옷은 무거운 거죽이 되었다. 비대해지는 거죽의 무게를 견디기 어렵다. 다리의 힘은 풀리고 더 이상 발을 내딛기 어려운 상황이 되었다. 
움직임은 멈춤 없이 계속되었다. 그러는 동안 해는 더욱 높은 곳으로 오르고, 열기를 더했다. 긴 장마에 땅이 머금은 물을 끌어올린다. 흙 알갱이 사이의 모든 물기를 공기 중으로 올린다. 공기 중의 수증기는 과포화 상태다. 수증기에 갇힌 얼굴은 태양의 이글거림을 온전히 재현한다. 아! 미치겠다. 숨이 턱까지 오르다 막힌다. 
장마가 시작되면, 늘 뒷 터의 수로가 터진다. 올해도 여지없다. 내 소유의 땅도 아니니 손을 댈 수 없는 상황이다. 매년 물꼬 정도 터 놨고 피해가 약했다. 그런데 올해 장마는 예상을 넘었다. 수로를 넘은 고운 흙은 집 뒤로 흘러내렸다. 기계장비가 들어갈 수 없는 좁다란 곳에 수북하다. 진흙에 가까운 흙이라 잘 떠지지도 않는다. 허리는 끊어질 듯하고, 이마의 땀은 비가 되어 흙을 적신다.
그러잖아도 질퍽한 흙인데, 사람을 미치게 한다. 그래도 수해라고 복구는 해야겠다. 봉사자는 없고, 달아오르는 얼굴에 주체할 수 없는 땀이 같이 한다. 
더 이상 참지 못할 상황이 되었다. 에따! 모르겠다. 옷을 벗어젖히고 찬물에 샤워한다. 그리고 다른 옷을 주섬주섬 갈아입고, 하던 일을 마저 한다. 긴 장마 끝에 이런 폭염이 있었는가? 하늘이 노랗다. 다리는 풀려 더 이상 흙인지, 맨땅인지 구별이 안 된다.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는다. 그리고 벌러덩 눕는다. 숨은 쉴 수조차 힘들고 눈은 초점을 잃었다. 이러다 죽는 건가? 저절로 눈이 감겼다. 그리고 한참이 지나서야 숨을 고르고 눈을 떴다. 
눈 위로 잎이 파르르 떤다. 처음엔 내 눈이 파르르 떠나 싶었다. 높다란 곳에 잎이 파르르 떨고 있었다. 설마 싶어 눈을 감았다. 그런데 파르르 떠는 소리가 들린다. 그리고 높다란 곳의 바람이 내 볼을 스쳐 지나간다. 스쳐 지나간 바람은 다시 하늘로 올라 잎을 움직인다. 눈이 저절로 바람을 따른다. 파르르 떨던 나뭇잎은 하늘거리는 바람을 맞는다. 하늘거리는 바람에 쪽빛 하늘이 넓어졌다 좁아지기를 반복한다. 모양도 각양으로 바뀐다. 색도 쪽빛 하늘에서 어느샌가 하얀 뭉게구름이 사이를 채운다. 모양도 달라지고, 색도 달라진다. 가쁘게 쉬던 숨이 어느샌가 편안하다. 침정이다. 아! 좋다. 
하던 일은 잊었다. 삽은 내팽개쳤다. 오늘 못하면 내일도 있는데, 이 순간은 오늘이 아니면 없을 것 같다. 멀리서 매미는 긴 호흡으로 짝을 부르고, 간간히 팔랑거리다 날갯짓을 멈춘 나비가 멋진 비행을 선보이기도 한다. 
몸은 침잠되었고 눈은 한 방향으로 고정되었다. 녹음이 진 잎이 앞뒤로 팔랑팔랑, 초록 바람이 보인다. 그리고 은빛을 더해 뒷면을 보인다. 짙게 깊게 녹음이 진 잎 사이의 하늘은 더 진한 쪽빛이다. 깊은 우물이 하늘에 있다. 어릴 적 집안 우물에 담긴 하얀 구름, 하얀 구름이 지나고 쪽빛 하늘이 담은 우물이다. 그 우물이 하늘에 떠있다. 천공의 우물이다. 그런데 오늘은 하늘의 파란 바람까지 우물에 담겼다. 그리고 잠시 머뭇거리는 사이 하얀 구름을 배경으로 멋진 날갯짓의 잠자리도 함께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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