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는 `인재'부터 인정하라
정부는 `인재'부터 인정하라
  • 권혁두 기자
  • 승인 2020.08.23 1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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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논단
권혁두 국장
권혁두 국장

 

1990년 9월 단양군을 덮쳤던 수해는 참혹했던 피해 외에도 몇가지 이목을 끌었던 게 있었다. 당시 단양읍 중심가가 침수되고 매포읍은 지붕만 보일 정도로 물에 잠겼다. 사흘간 200㎜의 폭우가 쏟아지긴 했지만 피해지역 주민들은 충주댐을 주범으로 꼽았다. 충주댐이 방류 조절에 실패해 댐에 갇힌 물이 역류하면서 상류의 단양이 물난리를 겪었다는 것이다.

댐 하류인 서울과 수도권 피해를 줄이기 위해 방류를 억제함으로써 단양을 희생양으로 삼았다는 주장까지 제기됐다. 이런저런 정황들이 주민들의 주장을 뒷받침 했고, 분노한 주민들은 수해복구도 미룬 채 충주댐을 성토하는 농성에 들어갔다. 수재민들은 인재를 인정하고 책임자 처벌과 완벽한 보상을 약속하라고 정부에 요구했다.

급기야 피해가 가장 큰 매포읍을 방문한 국회의원들이 주민들에게 억류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지금은 고인이 된 주병덕 당시 충북지사가 황급히 달려가 “우리를 도우려고 찾아온 의원들을 붙잡아둬서야 되겠느냐”며 주민들을 설득했다. 그러나 주민들은 요지부동이었다. 결국 주 지사는 주민들이 내놓은 각서에 서명을 하게된다. 정부를 대신해 인재를 인정한다는 내용이었다. 이 각서로 의원들은 풀려났지만, 주 지사는 바로 다음날 청와대에 의해 경질되고 만다. 불법 행위에 굴복하고 인재를 인정함으로써 들끓는 민심을 더 악화시켰다는 이유였을 것이다. 관료 목숨이 파리 목숨 같았던 관선시대 얘기다. 댐이 수해의 원인으로 지목된 것도, 도지사가 수해로 경질된 것도 그 때가 처음이었다.

30년이 지난 지금 비슷하면서도 다른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지난 8일 수해를 겪은 영동·옥천·금산·무주군이 수해 원인으로 용담댐의 방류조절 실패를 지목하며 공동대응에 나섰다. 홍수가 예고됐는 데도 사전 방류에 소극적으로 일관하다 수위가 차오르자 급격하게 방류량을 늘림으로써 하류 4개 군에 수해를 초래했다는 것이다. 댐 상류가 아니라 하류가 피해를 봤다는 점이 단양 수해때와 다르다. 인재를 인정했던 도지사가 옷을 벗어야 했던 그때와 달리 단체장들이 앞장서 인재를 주장하며 정부를 압박하는 모습도 사뭇 다르다. 박세복 영동군수의 제안으로 4개 군 군수들은 수자원공사를 방문해 용담댐 과다방류 문제를 따졌다. 4개 군 의장들까지 참여하는 공동대책위를 구성하고 소송까지 불사하겠다는 입장이다.

지금까지 드러난 사실관계만으로도 용담댐의 과실은 명백해 보인다. 수해를 전후한 지난 6일과 8일 영동군 수해지역 평균 강수량은 53㎜에 불과했다. 영동군은 20년전 태풍 `루사'로 최악의 수해를 겪었다. 복구비로 3000억원 이상이 투입됐다. 당시 하천 유역을 넓히고 제방을 강화하며 웬만한 비에는 끄떡없도록 중무장을 한 지자체다. 고작 53㎜ 강우에 침수를 겪을 가능성은 제로에 가깝다.

지난달 용담댐 저수율은 평균 80.91%로 2001년 이후 가장 높았다고 한다. 전국에 게릴라성 폭우가 출몰하고 홍수가 예상됐던 비상한 시기에 용담댐은 저수율을 전례없이 높게 유지하며 기상청 예보를 무시했다. 8월 들어서는 초당 300톤씩 방류하던 물을 45톤으로 줄여 내려보내기도 했다. 수위를 적정하게 낮춰 하류를 배려한 충주·대청·소양강댐 등과는 정반대의 행보였다. 결국 지난 8일 집중호우가 쏟아지자 방류량을 초당 300톤에서 1000톤으로, 다시 2900톤으로 급격하게 늘렸고, 하류는 이를 감당하지 못했다. 다목적댐의 목적인 `용수 확보'에만 급급하다 또 다른 목적인 `홍수 조절'을 망각한 행태였다.

댐 방류로 인한 재해는 규정에도 없어 보상 자체가 불가능하다고 한다. 하루 아침에 생계를 책임질 농토와 농작물을 날려버린 수재민들은 막막한 앞날에 억장이 무너지고 있다. 그런데도 수자원공사는 정부의 조사 결과를 기다려보자는 한가한 소리만 되풀이하고 있다. 정부가 나서 수재민들의 고통과 억울함을 풀어야 한다. 충북지사의 목을 단칼에 쳤던 30년전의 스피드도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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