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물의 영장
만물의 영장
  • 방석영 무심고전인문학회장
  • 승인 2020.08.20 1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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時論
방석영 무심고전인문학회장
방석영 무심고전인문학회장

 

불교에는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 삼계개고아당안지(三界皆苦我當安之)'라는 게송이 있다. 석가모니부처님의 탄생게다. 하늘 위 하늘 아래 오직 `나'만 홀로 존귀하고, 내가 마땅히 삼계의 모든 고통을 편안케 하리라는 의미의 가르침이다. 이 가르침은 기독교의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누구도 하느님 아버지에게로 갈 수 없고,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편안케 하리라는 성경 말씀과도 일맥상통한다.

이는 석가모니 부처님만이 홀로 높다거나, 예수님만이 길이고 진리며 생명이라거나, 혹은 도를 깨달은 자만이 높고, 다른 사람들은 다 부처님이나 예수님이나 깨달은 이의 발아래라는 말이 아니다. 모든 사람에게는 하늘이 부여한 참 생명이 깃들어 있기 때문에, 누구나 만물의 영장이고, 누구나 가장 존귀한 존재라는 것이 이 말이 드러내고자 하는 속뜻이다. 물론 이 말의 진의를 제대로 이해하고 삶에 용해시키기 위해선, 불교에서 말하는 `무상 무아'를 깨달아야 하고, 기독교에서 말하는 `심령이 가난한 자'로 거듭나야만 한다. 그때 비로소 `천상천하유아독존'내지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는 말의 의미를 온전히 소화하게 됨은 당연하다.

`천상천하유아독존'내지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는 말의 의미를 이해하기 쉽게 이론적 교학적 측면에서 살펴보면, 부처님이나 예수님 등의 대상 경계와 너와 나, 크고 작음, 밝음과 어두움, 있고 없음 등의 비교 분별심이 다 사라진 `무념무상 내지 심령이 가난한 상태'를 `천상천하유아독존'내지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표현했음을 알 수 있다. `나'라고 할 고정 불변의 실체가 없는 `무아 내지 심령이 가난한 자'로 거듭남으로써, 주객 양변을 여읨 없이 여읜 까닭에 모든 것이 하나인 일원의 천국 즉, 두 마음으로 갈등함 없는 한마음의 하늘나라의 삶의 특징이 바로 `천상천하유아독존'내지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는 말과 부합되기 때문이다.

나 없음의 `무아(無我)를 깨닫거나, 내 안의 온갖 주견을 텅 비우고 심령이 가난한 자로 거듭나면, 그 어디에도 나 아닌 대상이 따로 존재하지 않는 가운데 일심으로 천상천하유아독존 할 수밖에 없다. 하나마저 고집함이 없기 때문에 현상계를 떠난 별개의 하나라는 것이 따로 존재함도 없다. 하나는 언제나 온갖 다양한 모양으로 드러나면서, 이 세상을 창조하고 있다. 마치 물이 그 본성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온갖 모양의 파도로 출렁이는 것과도 다르지 않다. 이처럼 물이 파도를 일으키고 파도는 다시 물로 돌아가는 이 세상의 이치를 불교의 대표적 경전인 반야심경은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이라는 짧은 구절로 표현한다.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이란 말을 기독교적으로 분석한다면, 텅 빈 공(空)은 바로 눈에 보이지 않는 창조주 하나님이시다. 그리고 색(色)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피조물인 눈에 보이고 들리는 이 세상을 말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래서 길가의 작은 돌 속에서, 바람이 흔들리는 나뭇잎 속에도, 그 어디에도 성령이 임재하지 않은 곳이 없다는 말씀은 너무나 당연하다. 이 세상 삼라만상 모든 것이 하나님의 피조물이면서, 그 자체가 그대로 하나님의 분신이라는 것을, 불교는 불신충만어법계(佛身充滿於法界) 즉, 부처님 몸으로 이 세상이 가득하다는 말로 대신한다. 이 세상의 실상이 이와 같을진대, 하나님이 모습을 본떠서 만들어진 만물의 영장이며 부처 즉, 모든 인간이 어찌 서로 사랑하며 함께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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