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맞이꽃이 필 즈음
달맞이꽃이 필 즈음
  • 최운숙 수필가
  • 승인 2020.08.20 1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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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최운숙 수필가
최운숙 수필가

 

가경천 변에 언제 떠올랐는지 모를 초승달이 살구나무에 비스듬히 걸려 있다. 밤 운동을 나온 사람들은 낮을 잇듯 빠르게 걷는다. 천변 길옆에 달맞이꽃이 밤바람에 흔들리고 있다.

수명이 길어지고 건강하게 사는 것이 화두가 되면서 사람들은 걷기 운동을 즐긴다. 이른 아침이나 저녁 시간을 이용하는 사람이 많다. 나의 걷기는 저녁 여덟 시쯤에 시작한다. 그 시간은 가경천 변 달맞이꽃이 피어있는 시간이다. 잠들지 않은 시간을 쥐고 걷다 보면 둔치 곳곳에 피어있는 달맞이꽃을 만난다. 밤은 사람들의 세상 이야기로 물들고, 달맞이꽃은 금빛으로 일렁인다. 천변을 내려다보던 달은 뽀얀 분가루 얼굴로 나오기도 하고, 달무리 방석을 들고 나오기도 하며, 술래잡기하듯 구름 속을 노닐기도 한다. 그런 달을 바라보며 노래나 옛일을 전하는 것은 홀로 걷기의 재미다. 2시간쯤 지나 시작과 끝의 지점인 죽천교에 도착하면 나는 달맞이꽃에 달을 넘겨주고 야화는 절정을 향해 짙어진다.

몇 해 전부터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 꽃이 있다. 공원 한켠을 분홍빛으로 물들이고 있는가 하면, 골목길 담장 밑에도 이어달리고 있다. 분홍 낮 달맞이꽃이다. 최근에 우리나라에 들어오면서 정원 화초로 사랑받고 있다. 야생 달맞이꽃과 비교해보면 꽃잎이 조금 더 크고 달맞이꽃과 달리 아침에 꽃이 피어 저녁에 진다. 순차적으로 피는 달맞이꽃에 비해 낮 달맞이꽃은 몇 송이의 꽃이 함께 피어난다.

지난번, 주말부부로 지내는 남편에게 갔을 때다. 아주 예쁜 집이 있다며 구경 가자는 것이다. 안면도 없는 사람이라 내키지 않았지만 예쁜 것을 보여주려는 그의 의도를 알기에 못 이기는 척 따라나섰다.

그 집은 산 밑에 자리 잡은 아담한 한옥이었다. 부인의 건강이 좋지 않아 이곳에 집을 지은 지 삼 년째란다. 마당 입구에 들어서자 향기가 진동했다. 마당에 심어진 갖가지 약초와 희귀종의 향기려니 했는데 주인공은 백합과 분홍 달맞이꽃이다. 분홍 달맞이꽃은 은은한 백합 향이다. 그러니 한옥이 온통 백합 향기에 둘러 쌓여 있었던 것이다. 거기다 장독대까지 점령하고 있었다. 장독대를 어찌 들어갈까 의문이 드는 순간, 더 놀라운 것은 산을 깎은 경사면을 달맞이꽃이 점령한 모습이었다. 놀란 내 모습을 본 주인이 한마디 한다. 꽃이 예뻐 드문드문 심어놨는데 저리되었다는 것이다. 삼 년 만에 벽을 다 차지할 정도란다. 필요하면 나누어주겠다는 말에 몇 뿌리 받아왔다. 행복한 얼굴의 분홍 낮 달맞이꽂도 예쁘지만, 나는 여전히 달맞이꽃이 그립다.

달맞이꽃은 아름다운 시로 빚어지기도 하며 노랫말로 쓰이기도 한다. 애틋한 전설을 갖고 있어 좋아하는 사람이 많은 꽃이다. 나는 꽃말이나 전설보다도 사람의 눈길이 드문 시간에 피는 꽃이라 마음이 더 가기도 하며, 밤을 밝히는 꽃이어서 좋다. 척박한 곳에 물기만 있으면 뿌리를 내린다. 다른 식물을 방해하지 않고 자신의 둥지를 일군다.

경제 사회를 치열하게 살아가고 있는 우리는 이기는 것이 목표가 되었다. 직장에서도 그렇고 정치 세계는 더더욱 그렇다. 손자병법은 있는 그대로를 바라보며 철저한 대비를 주문한다. 상대를 꺾어야만 내가 승리하는 것이 아니라 싸우지 않고 이기는 법이 최상의 전략임을 말한다. 달맞이꽃에 배워야 할 때다. 인간의 자만심은 때때로 이렇게 작은 식물로 인해 부서지기도 한다. 그러나 부서지면서 성장한다.

밤을 걷는 가경천 변 사람들에게서 아름다운 달맞이꽃 향기가 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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