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의 역사와 치수(治水)
인류의 역사와 치수(治水)
  • 김도연 충청북도문화재연구원 중원학연구팀장
  • 승인 2020.08.13 2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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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즈 포럼
김도연 충청북도문화재연구원 중원학연구팀장
김도연 충청북도문화재연구원 중원학연구팀장

 

최근 한반도에 내린 폭우로 인해 인명과 재산피해가 막심하다고 하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여름철이면 반복되는 장마나 태풍, 우리는 과거부터 날씨를 예측하고 치수사업을 통해 피해를 막고자 하였지만 현대의 발달한 기술조차 이를 완벽히 예방하기는 역부족인 것 같다. 의학의 발달로 평균수명을 늘어나고 교통의 발달로 전 세계 어디든지 갈 수 있으며, 심지어 우주여행도 가능하게 되었는데, 우리는 자연 앞에서 한없이 무기력한 한 존재일 수밖에 없다.



인류의 역사를 보면 치수(治水)사업은 문명의 발생과 함께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4대 문명의 발상지 중 하나인 이집트는 나일강의 범람시기를 예측하면서 문명을 꽃 피우게 되었다. 또한 중국의 삼황오제 신화에서는 오제의 마지막 군주인 순임금이 홍수를 다스리기 위해 우를 등용하여 치수에 성공하였고, 후에 우가 순임금의 선양을 받아 왕이 되었으니 이 왕조가 바로 하왕조라고 전한다. 우리나라의 단군신화에도 환인의 아들 환웅이 비를 관장하는 우사를 비롯하여 풍백과 운사를 거느리고 내려왔다 하니 치수의 중요성을 엿볼 수 있다.



우리의 문화유산 속에서도 치수를 위한 노력의 흔적을 볼 수 있다. 이미 삼한시대에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저수지로 알려진 제천 의림지, 김제 벽골제, 밀양 수산제 등이 만들어졌다. 특히 조선후기에는 모내기법의 도입으로 치수의 중요성이 더욱 부각되었는데, 이로 인해 전국적으로 수많은 수리시설이 확충되기도 하였다. 한편 우리 역사에서 치수사업하면 빼놓을 수 없는 왕이 있으니 그가 바로 영조이다. 영조는 청계천 준설사업을 진행하였는데, 당시 청계천은 홍수가 나면 주변의 집이 물에 잠기고, 평상시에도 수질이 더러워 당시 골칫거리 하천이었다. 하지만 영조는 준설사업으로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였는데, 이 사업은 영조 스스로도 자신의 업적이라 할 정도로 엄청난 규모의 프로젝트 사업이었다.



한편 우리나라의 건축기술에서도 물에 의한 피해를 줄이기 위한 공법을 확인할 수 있다. 당대 최고의 건축시설을 보여주는 산성이 그 사례인데, 고대부터 산성에는 성 안의 물을 성 밖으로 배출하여 성벽이 빗물에 의해 붕괴되는 것을 막고자 수구를 만들었다. 수구는 성벽을 통과하는 배수시설로 볼 수 있는데, 삼국시대 축조된 보은 삼년산성이나 단양 온달산성 등에서 볼 수 있다. 또한 우리나라 축성기술의 결정판이라 여겨지는 수원화성에서는 성을 가로질러 흐르는 하천에 여러 칸의 웅장한 수문을 건설하고, 성 안에 우물을 파는 등 매우 치밀한 치수의 흔적을 확인할 수 있다.



현대사회에서도 치수사업은 매우 중요하다. 인구의 증가 등으로 인해 안정적인 생활용수 공급이 필요하고, 농업용수는 물론 산업화로 인해 공업용수의 공급도 신경 써야 한다. 또한 장마철 하천의 범람으로 인한 침수피해도 예방해야 한다. 이러한 이유로 해방 이후 수많은 수리시설들이 만들어졌는데, 1950년대 처음으로 국내 기술에 의해 건설된 괴산댐을 시작으로 충주댐, 대청댐 등 수많은 댐이 건설되었다.



이처럼 건국신화에서부터 현대사회에 이르기까지 물을 어떻게 잘 관리할 것인가는 하나의 큰 과제였던 것 같다. 지금까지 남아있는 수리시설이나 축성기술을 통해서도 옛 사람들의 이러한 고민들이 엿보인다. 그럼에도 현재 인류는 완벽한 치수를 이루지 못하였으며, 이 때문에 물을 다스린다는 치수라는 말이 가능한 것인지 의문이 들기도 한다. 그렇다 하더라도 우리는 더 이상의 비 피해가 없도록 치수의 노력을 이어나갈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번에 피해를 입은 많은 사람들이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응원과 보상이 이루어지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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