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크게 사고치는 충청타임즈 기대합니다
더 크게 사고치는 충청타임즈 기대합니다
  • 정규호 칼럼니스트
  • 승인 2020.08.13 20:3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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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타임즈 창간 15주년에 부처
정규호 칼럼니스트
정규호 칼럼니스트

 

나도 한때는 기자였습니다. 그 소중한 인연은 수십 년이 훌쩍 지난 지금까지도 나의 영혼과 정신을 지배하는 자양분이 되고 있습니다.

그런 까닭인지 요즘도 나는 매일 하루의 일과를 신문읽기로 시작하는데, 대개 2시간 이상은 꼬박 신문읽기에 몰입하며 살고 있습니다.

신문을 탐독하는 나의 습관은 기자에 입문하기 훨씬 전인 초등학교 시절부터로 기억됩니다. 선친께서 신문 애독자였던 탓에 겨우 글을 깨우친 이후 줄곧 신문을 읽어 온 셈이니, 말하자면 지금까지의 내 인생은 오롯이 신문과 더불어 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독자에 머물던 내가 신문기자가 된 것은 독자에서 직접 당사자로, 소비자에서 생산자로 책임과 본분이 크게 달라짐을 의미합니다.

푸른 청년의 시절 신문기자로 입문할 당시의 몇몇 장면은 내 삶이 다할 때까지 절대로 잊을 수 없는 기억으로 각인되어 있습니다.

책상마다 각종 자료와 책들이 사람을 가릴 정도로 쌓여 있던 처음 보는 편집국의 전경. 햇살은 커다란 창문을 통해 눈부시게 들어오는데, 그 공간에 운무처럼 드리워진 담배연기는 요즘엔 절대 재연할 수 없는 풍경이겠지요.

그렇게 시작된 수습기자 시절의 몇 가지 금과옥조 같은 가르침은 지금도 내 삶의 죽비가 되고 있습니다.

“신문은 성경과 같다”는 어느 선배의 말은 “성경이 잘못된 인생을 항상 경계하듯이 신문 역시 사람들에게 올바른 길을 제시해야 하고 기자는 항상 이를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이어집니다.

그 말씀을 듣던 청년 시절의 나는 `아~ 저분은 독실한 기독교인인가 보다'하고 짐짓 대수롭지 않게 여겼으나, 그 높은 이상은 지금까지 내 심장에 깊게 새겨져 있습니다.

`신문은 사회적 공기, 사회적 거울'이라는 말과 `기자는 사회의 목탁'이라는 말은 지금은 잘 사용하지 않는 관용어가 된 듯합니다.

그러나 이 아포리즘은 지금도 잊지 말아야 할 고전에 해당합니다. `신문은 성경과도 같다'는 옛날 한 선배의 말씀은 창간 15해를 맞는 충청타임즈가 항상 초심을 잃지 않아야 한다는 금언에 해당할 것입니다.

신문은 자아성찰의 합리적인 통로입니다.

청년의 수습기자 시절, 그날의 뉴스 가운데 가장 큰 뉴스는 누구일지라도 자신에 대한 기사라는 가르침도 사무칩니다.

과장된 표현이겠지만 “다시 전쟁이 일어나도 자신에 대한 기사가 그날 신문에 실렸다면 누구라도 예외 없이 그 기사를 먼저 찾아보는 것이 인간의 심리”라는 선배의 당당한 교육은 심오한 철학입니다.

신문에서 자기 자신을 가장 먼저 찾는다는 것은, 신문을 통해 혹시 놓치고 있거나 잊어버렸거나 잃고 있는 자아를 발견하는 일이며, 그로 인해 스스로를 성찰할 수 있는 계기를 찾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신문은 수신(修身)- 제가(齊家)- 치국(治國)- 평천하(平天下)로 이어지는 경로의 나침반이며, 당당하게 크게 펄럭이는 돛대와도 같습니다. 자아를 찾고 집 안팎의 일을 잘 보듬고 사회를 건강하게 잘 다스리며 세상을 평화롭고 태평하게 만드는 일의 시작은 신문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충청타임즈와 그 신문을 만드는 사람들은 참으로 큰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매일 매일의 신문은 문자의 화수분입니다.

먼 옛날 문자의 발명은 사람을 비로소 사람이게 했습니다. 문자를 통해 소통하고 문자를 통해 역사를 만들어 가며 문자를 통해 모든 세상 일을 공식화합니다. 문자를 통하지 않는 세상은 의미가 없으며, 믿음 또한 만들어질 수 없습니다.

모국어로 써지는 매일 매일의 신문에 도대체 몇 개의 글자와 낱말이, 그리고 문장이 들어가는지를 일일이 세어 볼 필요가 있을까요. 다만 초성과 중성, 종성의 한글 모음과 자음이 조화를 이루어야 완성되는 낱글자와 낱말은 선택하기까지 신중에 신중을 더할 수밖에 없고, 그렇게 낱말들을 모아 하나의 문장이 완성되며, 그 문장들이 모이고 모여서 의미를 만들어야 비로소 뜻이 전달됩니다. 그러니 매일 매일 화수분처럼 솟구치는 문자와 문장, 그리고 기사라는 이름으로 완성되는 글은 일일이 지극한 정성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리하여 신문은 그날그날의 정성이 모아져 영원한 미래로 나아가는 역사가 되는 것입니다.

흔히 문자의 위기, 신문의 위기를 말합니다.

그러한 시대 상황은 역사적으로 항상 제기돼 왔습니다. 그러나 인류는 언제나 그 위기에서 무너지지 않고 지금까지 문자와 더불어 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신문의 위기 역시 이를 극복하기 위한 불굴의 의지를 통해 반드시 떨쳐낼 수 있습니다. 초짜 기자 시절의 나를 비롯한 동료, 선·후배들은 신문사에서만 통용되는 130자 원고지에 볼펜으로, 말 그대로 `글'을 쓰는 시대를 살았습니다.

지금은 그렇게 육필원고는 쓰는 시대가 아닙니다. 노트북 혹은 데스크탑 컴퓨터 자판을 두드려 문장을 만들고 기사를 씁니다. 다만 도구가 기술의 발전에 따라 바뀌었을 뿐 기자가, 그리고 신문이 전달하고자 하는 의도는 전보다 훨씬 더 크고 깊으며, 빠르게 의미망(意味罔)을 만들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니 15주년을 맞이하고, 100년, 200년을 지나 천 년이 되도록 깊은 의미와 넓고 따뜻한 가슴으로 `눈과 마음이 커지는 신문' 충청타임즈의 영원함은 스스로 약속하고 다짐해야 할 일입니다.

충청타임즈의 창간 15주년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잘 커왔습니다. 인생의 나이로 15살이면 딱 중 2병에 해당되는 시기입니다. 예측할 수 없는 변화와 당돌함이, 그리고 온몸에 도전의 태세가 가득한 질풍노도의 시기처럼 더 크게 사고를 치는 충청타임즈를 기대합니다.

역사는 그렇게 만들어지는 것이고, 신문은 그날그날이 역사의 기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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