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리 있는 ‘장마’의 끝
멀리 있는 ‘장마’의 끝
  • 정규호 문화기획자·칼럼니스트
  • 승인 2020.08.11 19:5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수요단상
정규호 문화기획자·칼럼니스트
정규호 문화기획자·칼럼니스트

 

`정말로 지루한 장마였다.' 윤흥길 소설 <장마>는 이 문장으로 끝난다.

소설처럼 장마가 끝나는 날이 언제가 될지 모르는 채 두터운 하늘을 이고 사는 무거운 나날이 벌써 수 십일이 지나고 있다. 강물은 넘치고, 둑을 무너뜨리고, 산비탈 흙을 깔아뭉개며 국토에 마구 상처를 내고 있다. 그렇게 물에 휩쓸리고 무너지는 땅은 생명을 빼앗고, 삶의 터전을 유린하며 사람을 절망에 빠트리고 있다.

`정말로 지루한 장마였다.'를 마지막 문장으로 소설은 끝났다. 그리고 우리 삶을 덮친 장마도 언젠가는 끝날 것이다. 그러나 소설 <장마>와는 달리 우리 안의 장마는 여태 끝나지 않았고, 어쩌면 그 끝을 장담하기 어려운 시대는 견고하게 오래 지속될지도 모르겠다.

윤흥길의 <장마>는 이데올로기의 대립과 그 갈등을 극복하는 사람 사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1973년 발표된 소설 <장마>는 젊은 날의 나에게 상당히 매혹적이어서 언젠가 연극 무대에 올리고 싶은 마음에 각색을 해놓기도 했다.

한국전쟁의 시간과 공간을 배경으로 삼촌과 외삼촌의 다른 길(국군과 빨치산)과 입대한 외삼촌의 죽음과 입산한 삼촌의 행방불명. 이 둘을 아들로 둔 할머니와 외할머니의 극단적인 대립과 갈등이 마주치는 이야기 구조를 지니고 있다. 천재지변인 `장마'와 인간의 탐욕으로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전쟁의 비극 사이에서 정작 화해의 메신저는 집안의 `업'으로 모셔지는 구렁이이다. 그 구렁이는 대립과 갈등의 당사자인 두 할머니에게 현실에서 사라진 아들들의 환생으로 믿는 토속신앙의 상징인 셈인데, 천재지변이거나 비극적 전쟁일지라도 차라리 치유는 인간이 아닌 온전히 자연의 몫이다.

소설 <장마>는 `정말로 지루한 장마였다.'를 마지막 문장으로 갈무리됐다. 그러나 우리는 분단 이후 지금까지 그 이야기의 끝을 보지 못한 세상을 여전히 살고 있다.

세상은 종북좌빨과 토착왜구로 나뉘어 서로를 비난하며, 이를 각자의 진영을 지키는 흔들릴 수 없는 토속신앙처럼 여기는 조금 다르게 변화했을 뿐이다. 게다가 몸보신을 위해서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 인간의 욕망 탓에 자연생태가 철저하게 유린되면서 구렁이는 눈을 씻고도 찾아보기 어려운 지경이니 화해와 상생의 메신저도 기대할 수 없다.

난생 처음 겪어보는 길고 지루한 장마는 시베리아 대륙의 찬 공기와 북태평양의 고기압 사이에 끼어 한반도를 오르락내리락하는 두터운 비구름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진단은 극히 1차원적인 과학적 분석에 불과하다. 더 근본적인 원인은 지구온난화에 따른 기상이변이라는데 이견은 없다. 다들 그렇게 알고는 있는데, 원인을 뻔히 알면서도 이를 해결하기 위한 노력은 각별하지 않다. 그러므로 이토록 지겹고 두려운 `장마'는 때가 되어 다만 물러날 뿐, 결코 그 끝을 우리에게 보여주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불안하고, 모두가 더 각성해야 하는데, 나라는 `기후악당'이라는 비난에서 헤어나려는 과감함이 없고, 우리는 생활 속 쓰레기 줄이기와 에너지 절약 등 지구온난화를 더디게 하려는 노력에 세심함과 단단함이 없다.

지극히 국지적 양상을 보이고 있는 최근의 `장마`들은 피해지역과 그렇지 않은 지역 사이에 양극화와 배제의 씨앗으로 잘못 뿌려질 우려도 있다. '나만 아니면 된다`는 안일함은 언제나 인간을 노린다.

긴 장마와 코로나19는 서로 다른 곳에서 온 것이 아니다. 인간의 무절제한 생태 파괴로 `인수공통감염병'으로 나타난 코로나19가 여태 그 끝은 보이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가장 긴- `장마'역시 자연의 섭리를 함부로 무너트리는 인간 세상에 대한 준엄한 경고로 받아들여야 한다.

4대강 사업은 하지 않았기 때문에 물난리가 커졌다거나, 4대강 사업 탓에, 그리고 그렇게 황폐화된 국토의 치유를 위한 물막이 보의 철거와 수문개방을 망설이고 있는 사이 수해를 입었다는 `네 탓'만의 정치 세력과 동시대를 살고 있음은 비극이다.

`장마'의 끝은 멀기만 한데, 우리는 언제쯤 `정말로 지루한 장마였다.' 며 담담할 수 있을까. 매미 울음소리도 멈춰 버린 이 여름에.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