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논단
충청논단
  • 충청타임즈
  • 승인 2007.05.28 08:4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후배의 비수(匕首)
김 승 환 <충북시민사회단체 연대회의 상임대표>

아무날 아무시의 일이다. 낙엽 지는 쓸쓸한 가을이었다. 청운(靑雲)의 뜻을 민중에 두고 일생을 민족에 걸어 강강히 하루를 사는 후배의 칼이 내 허파를 향했다. 대체 당신은 왜 충청타임즈를 지지하느냐는 단도의 직입(直入)이었다. 망연했다. 무슨 뜻인지 알았지만, 짐짓 왜 그러느냐고 딴청을 부려본다.

이번에는 충청타임즈가 아니라 김가 당신에 대해서 심판을 해야 하겠다는 결연한 표정으로 비수를 휘두른다. 역시 무슨 뜻인지 알았으되 내가 수수께끼의 표정을 짓자, 어이없다는 듯이 아무날 아무시 충청타임즈의 사설과 사회면을 보지 않았느냐고 대지른다.

왜 모르겠는가. 말하자면 이럴 것이다. 하이닉스 매그나칩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눈물서린 투쟁을 보도한 그날의 사설은 현대자동차 노조가 귀족스러워서 노동운동이 나라를 망친다는 내용이었다. 나와 성이 같은 김 후배는 노동운동에 대해서 필살(必殺)의 적대감을 가진 논조로 사설이 실리지 않았느냐고 따졌다. 그러니까 이렇다. 일간지의 하루 판형이 노동운동에 대한 따스한 시선과 차가운 시선이 공존할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따스한 시선이면 따스하게, 차가운 시선이면 차갑게 일관된 논조를 가져야 한다는 그의 주장은 과연 잘못이 없어서 멋쩍은 쓴 웃음으로 자리를 모면하기만을 엿보는 나는 비겁한 선배였다.

그러니까 김 후배의 말인즉슨, 정론직필을 하지 못하고 권력에 야합하며 수구보수의 덫에 매였던 충청일보를 해체하고 충청타임즈를 창간하는데 진보개혁 세력이 지지했던 것은 오로지 역사의 정의를 위해서가 아니었느냐는 것이다. 맞다. 우리가 정론직필과 진보개혁을 위하여 한줌 정성을 보탠 것 맞다. 진보개혁의 횃불과 정론직필의 기치를 들고 캄캄한 미래를 항해하고자 했던 것이니, 2005년 8월 15일 충청타임즈의 창간은 바로 그 횃불 하나를 들어보자는 것이었던 것이었다. 거기에 김가 당신이 모종의 관계가 있으므로 작금의 사태도 책임을 지라는, 차가운 질책을 김 후배는 하고 있었던 것이다.

후배에게 찔린 내 허파는 피를 흘리고 있었다. 그러나 사랑하는 김 후배여, 세상이 어찌 우리 뜻대로만 될 것이냐. 다 기억할 수는 없으나 내가 항변했던 뜻은 이랬다. 진보개혁의 왼쪽 바퀴만으로 수레가 가겠는가 저 지난 수십 년 간 우리는, 창공(蒼空)의 새에게는 왼쪽 날개와 오른 쪽 날개가 있어야 하니 왼쪽 날개를 인정해 달라고 외치지 않았더냐. 그런데 오른쪽 날개와 오른쪽 바퀴는 무시하고 오로지 왼쪽 날개와 왼쪽 바퀴만이 중요하다고 한다면 우리 스스로 모순이 아니겠는가. 현대자동차 노조에 대한 비난은 오른쪽 바퀴이고 하이닉스 비정규직 노조에 대한 지지는 왼쪽 바퀴이니, 그런 점에서 오히려 두 바퀴의 조화가 빛나지 않느냐라고 말하는 순간, 김 후배는 더 이상 선배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표변한 낯빛으로 휑하니 사라졌다. 캄캄했다. 비끼는 햇살은 아직 환했어도 어둠이 드리운 마음은 종내 무거웠다. 후배가 사라진 허공에 대고 나는 말을 잇고 있었다. 민주적 진보언론의 기치(旗幟)만으로 신문이 존재할 수 있는가. 진정 사회변혁의 뜻을 가졌다면 어려운 지역신문들의 고난과 고통도 이해할 지혜와 아량이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진보개혁의 가치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먹고사는 문제도 중요하다. 진정한 사회변혁운동가라면 경제도 중요하다고 말할 줄 알아야 하고, 물러서고 양보할 줄도 알아야 하며, 지역언론의 어려움도 이해해야 한다. 말이 되는지는 모르겠으나, 나는 이렇게 어려운 지역언론의 방패(方牌)가 된 적도 있다. 지금도 시민민중단체의 힘으로 진보적 민주언론을 창간해 보자는 김 후배의 말보다는 현재의 여러 지역언론들을 지지하고 성원하는 나는 현실주의 좌파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