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손의 안녕을 비는 마음을 담은 충북의 태실
자손의 안녕을 비는 마음을 담은 충북의 태실
  • 윤나영 충북도문화재연구원 문화재활용실장
  • 승인 2020.08.05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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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즈 포럼
윤나영 충북도문화재연구원 문화재활용실장
윤나영 충북도문화재연구원 문화재활용실장

 

저출산의 시대이다. 2020년 우리나라의 출산율은 1.1명으로 유엔인구기금(UNFPA)의 조사 결과 198개국 중 가장 낮은 수치를 기록했다. 언론은 연일 저출산 문제를 지적하고, 정부는 다양한 출산장려 정책을 실시하고 있지만, 안타깝게도 여전히 출산율 그래프는 하양곡선이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아이와 출산에 대한 관심은 점점 더 높아지고 있다. 르봐이예 분만, 라마즈마 분만 등등 이름도 생소한 다양한 분만 방법이 등장했고, 태어난 아기의 건강을 위해 탯줄 속에 든 제대혈을 보관해주는 은행이 절찬리 운영 중이다. 이 밖에도 태반과 탯줄의 영양소를 최대한 아이에게 전달하기 위한 연꽃 분만이란 분만방식이 한때 각광받기도 했으며, 태반의 영양소를 활용한 태반주사가 의학적 목적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이처럼 현대 사회에서 출산과 더불어 태(胎)에 대한 관심은 지속적으로 이어지고 있다. 하지만 태의 중요성이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훨씬 먼 과거부터였다. 우리 선조들은 한 사람의 인생이 바로 이 태에서 출발한다고 생각하였고, 태를 어떻게 처리하는지가 이후 아기의 삶과 밀접하게 연관된다고 여겼다. 그래서 태가 배출되면, 함부로 버리지 않고 다양한 방법으로 처리하였다. 민간에서는 태를 불에 태우거나, 물에 띄워 보내거나, 땅에 묻거나 혹은 말려서 보관하는 등 다양한 방식을 사용하였다. 반면 왕실에서는 “장태(藏胎)”방식만을 사용하였는데, 이는 태를 항아리에 담아 명당에 해당하는 산 정상에 묻고, 이를 보호하는 시설인 태실을 설치하는 방식이다. 그리고 문헌에 따르면 이러한 장태문화는 삼국시대 이전인 삼한시대부터 시작되었으며, 이후 삼국시대를 거쳐 고려, 조선까지 이어졌다.

그 중 우리나라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태실이 충북 진천에 있다. 바로 신라의 명장 김유신의 태실이다. 진천읍 상계리 태령산 정상부에 위치한 이 태실은 신라시대부터 신성시되어, 이곳에 사당을 짓고 봄 가을로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지금도 태령산 정상에 오르면, 무덤처럼 둥글게 봉분을 쌓은 김유신의 태실을 만날 수 있다.

김유신 태실뿐 아니라 조선 왕실의 태실도 충북 곳곳에 있다. 대표적인 예는 충북 청원군 낭성면에 위치한 영조 태실로, 1695년 처음 조성되었으며 1729년 현재의 모습처럼 석물로 단장되었다. 이처럼 기존에 있던 왕자의 태실을 석물로 치장하여 재봉축하는 것을 “가봉(加封)”한다고 하는데, 이는 왕자가 왕으로 등극한 경우에만 시행된다. 청주 영조 태실이 다른 태실유적보다 특히 더 의미 있는 것은 바로 이 “가봉”의 절차를 상세히 적은 기록물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2016년 보물 1901-11호로 지정된 `조선왕조의궤 : 영조태실석난간조배의궤'에는 1729년 가봉할 당시 태실의 규모와 구조, 조성을 위해 들어갔던 물자와 인력, 조성 절차 등이 매우 상세하게 남아있어 조선왕실 태실문화를 알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이 외에도 충북에는 충주 경종 태실, 보은 순조 태실, 청주 문의면의 산덕리 태실 등이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이 태실들은 대부분 1928년 일제강점기 때 조선총독부에 의해 도굴되어, 태항아리는 서울로 옮겨지고 석물들은 훼손되었다. 그리고 해방 이후 차례로 원형의 모습으로 보수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일제의 도굴로 비록 봉안한 태항아리는 사라졌지만, 전국의 명당을 찾아 자손의 태를 보존하며 후손의 앞날을 축복하려는 선조의 마음은 아직도 태실 유적에 그대로 남아있다. 올여름,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복잡한 휴가지 대신 맑은 기운이 가득 흐르는 충북의 태실을 찾아 떠나보는 것을 어떨까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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