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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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경순 수필가
  • 승인 2020.08.04 1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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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문앞에서
김경순 수필가
김경순 수필가

 

장대 같은 비가 연일 내리쏟아지고 있다. 그럼에도 밤이 되면 잠깐 비가 멈춘 틈을 타 어김없이 아름다운 소리를 들려주는 녀석들이 있다.

“또르르 또르르 또또 또르르르”

여름밤의 세레나데다. 어딘가에 있을 자신의 짝을 향한 귀뚜라미의 소리가 지루한 장마를 잠시 잊게 해 주는 밤이다. 예년 같으면 낮에는 무더위로 밤이면 열대야로 잠을 설쳐야 맞다. 하지만 웬일인지 장마가 지루하게 길어지고 있다. 끝날 듯하다가도 다시 내리고 그렇게 이어진 지 달 반을 넘어서고 있다.

먹구름이 잔뜩 낀 밤하늘에 웬일인지 달이 마실을 나왔다. 형체가 흐린 걸 보니 달무리를 대동한 모양이다. 보름달치곤 크기도 작다. 하지만 그도 잠시, 먹구름이 심술이 났는지 달을 덮쳐 버렸다. 달도 질세라 다시 구름 속에서 빼꼼히 얼굴을 내밀었다. 그러다 이내 먹구름이 앞을 가리고 그렇게 한참을 실랑이를 벌이고 있다. 이제는 바람이 합세를 했는지 구름의 움직임이 빨라졌다. 하늘은 이제 구름이 온 하늘은 검게 만들어 놓았다. 그때 먼 데 하늘에서 번쩍 번개가 치더니 뒤이어 천둥까지 큰 소리로 울음을 토해내고 있다. 들이칠 비에 창문을 닫아야 하는데도 나는 여전히 침대에서 꿈쩍을 하지 않았다.

어느새 잠이 들었을까. 분명 엄마의 목소리였다. 문을 여는 소리가 들렸고, 뒤이어 나는 마당으로 뛰어나갔다. 엄마는 온데간데없고 그곳에는 미역 한 봉지, 계란 한 판, 김 한 톳, 두부 두 모, 콩나물 한 봉지가 놓여 있었다. 어찌 아셨을까. 해마다 생일이면 잊지 않고 사서 마당에 슬며시 놓고 가셨는데 올해도 엄마가 오셨나 보다. 대문을 열고 엄마를 찾아 아무리 두리번거려 보아도 보이질 않는다. 엄마를 찾으려 막 뛰어가는데 빗방울이 어찌나 세게 내 얼굴을 때리는지 두 팔을 허부적이다 잠에서 깨고 말았다.

방충망이 덧달린 창문으로 비가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한 모양이다. 바깥 창문을 급하게 닫고 한참을 그렇게 우두망찰 앉아 있었다. 창밖에서는 문을 열라는 듯 빗방울들이 아우성을 치고 있다. 돌아가신 엄마가 그리웠던 걸까. 하긴 이맘때면 유난히 엄마 생각에 가슴이 아려오곤 한다. 당신을 닮아 생선은 물론이고 육고기라곤 입에 대지 못하던 막내딸이 엄마는 생전 안쓰러웠는지 생일날만은 딸이 제일 좋아하는 것들로 생일상을 차려 주시곤 했다.

제삿날이나 올라오던 김, 큰오빠 새벽밥에 얹어 놓았던 계란찜, 아마도 세 살 때쯤이었을 것이다. 죽은 줄 알았던 내가 먹고 살았다는 두부, 친정집 윗목에서 검은 천으로 덮여 기르던 시루 콩나물, 내가 제일 좋아하는 음식들이다. 가난한 살림에 찬이라곤 김치나 고추장이 전부였던 어린 시절 그래도 엄마는 내 생일 날만은 꼭 차려 주셨던 반찬들이었다. 그리고 내가 시집을 와서는 슬그머니 마당에 사 놓고 가시곤 했다. 이제는 엄마가 계시지 않은 내 생일상에는 아이들이 좋아하는 반찬이 차려진다.

얼마 전 내 생일이 지났다. 다행히 이번 생일은 일요일이라 아이들이 내려와 생일상을 차려 주었다. 상에는 김도, 두부도, 콩나물도 없었다. 그래도 아이들의 정성에 맛있게 먹었다. 이상한 일이다. 배부르게 먹었음이 분명한데 금방 허기가 졌다. 가끔씩 엄마 밥이 그리워 집으로 내려온다는 아이들의 마음이 이런 것일까. 조미료라곤 없던 그 시절 엄마가 해주신 반찬은 세상의 그 어떤 맛난 요리보다도 맛있었다. 아마도 그건 내가 아이들을 위해 해 준 음식이나, 엄마가 나를 위해 만들어 준 것은 음식이기 전에 애틋한 엄마의 마음이 들어간 사랑이란 걸 알았다.

언제 비가 그쳤는지, 다시 또 작은 풀벌레들의 울음소리가 잠 못 드는 내 창가에서 맴돌고 있다. 밤은 깊어가고, 엄마 생각에 잠은 이미 멀리 사라져 버린 지 오래다. 작은 보름달이 내 마음을 알기라도 한 듯 맑은 얼굴로 엄마처럼 미소를 짓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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