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눈 속의 들보를 보라
네 눈 속의 들보를 보라
  • 방석영 무심고전인문학회장
  • 승인 2020.07.30 1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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時 論
방석영 무심고전인문학회장
방석영 무심고전인문학회장

 

요즘 유행하는 말 중에 `내로남불'즉, 내가 하면 로맨스고, 남이 하면 불륜이라는 말이 있다. 자기 자신의 큰 잘못은 오히려 감추고 미화하면서, 타인의 작은 잘못은 들춰내고 부풀리는 세태를 반영하고 있는 `내로남불', 정치계는 물론이고 우리 사회 전역에 만연돼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그뿐만이 아니다. `내로남불'은 비단 어제오늘의 문제가 아니라,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자신의 욕심과 욕망 충족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인간의 아킬레스건으로 자리 잡고 있다. 이와 같은 까닭에 예수님은 “네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끌은 보지만 네 눈 속의 들보는 보지 못하는구나.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낼 때에 비로소 네 형제의 눈에서 빼낼 티끌을 볼 수 있으리라.”고 말씀하신 바 있다.

사람들은 타인의 잘못에 대해선 예리하게 지적하고 냉정하게 분석하면서도, 정작 자신의 잘못에 대해선 쉽게 인정하지 않는다. 심지어는 자신의 잘못을 교묘하게 합리화시키는 일도 서슴지 않는다. 혹은 자신의 잘못에 대해선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너그럽고 관대하기 십상이다. 이 같은 이율배반적 삶을 경계하기 위해 예수님께서는 위와 같은 말씀을 하셨을까? 단순히 타인의 잘못보다도 자기 자신의 잘못에 대해 더욱더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라는 도덕률을 가르치기 위해서 하신 말씀일까? “형제 눈의 티끌은 보지만 네 눈 속의 들보는 보지 못한다”는 짧은 한 마디 속에는 동서고금의 모든 수행을 총섭(總攝)하는 중요한 비밀이 내포돼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듯싶다.

수행의 핵심은 밖으로 향하는 마음을 안으로 되돌리는 것이다. 색, 성, 향, 미, 촉, 법, 육경(六境)으로 향하는 의식의 빛을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감촉하고', `의식하는'그 당처(當處)로 되돌리는 회광반조(回光返照)가 바로 수행의 요체다. 예를 들어 유명인사의 성추행을 보도하는 TV 뉴스를 보는 순간, 대개의 사람들은 즉시 그 못된 범인에 대해 분노하면서 욕을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는 자신의 옳지 못했던 과거의 행동을 부끄러워하고 타인의 옳지 못한 행동을 미워하는 마음인 수오지심(羞惡之心)의 발현이라는 측면에서 전혀 문제될 것이 없다. 그러나 수행자라면 범인을 욕하는데 온통 마음을 빼앗긴 채 흥분하기보다, 그 흉악범에 대해 분노하며 욕을 하고 있는 자기 자신을 즉시 알아차리고, 고요한 마음으로 되돌아옴으로써, 마음을 0점 조정할 수 있어야 한다.

매 순간순간 대상에 집착하며 매몰되기 보다는, 대상에 대한 자신의 생각과 말과 행동을 알아차리고 비춰보는 것, 이것이 바로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끌이 아니라 자신의 눈 속에 있는 들보를 보는 것'이다. 언제 어느 곳에서나 자신의 생각과 말과 행동을 간단없이 비춰보는 관법(觀法) 수행을 통해, 자신의 눈 속에 있는 들보를 빼내면 비로소 반야의 지혜로 빛나는 푸르른 눈으로 정견(正見)할 수 있게 된다. 그 전에는 형제의 눈 속에 실재하는 티끌을 본 것이 아니라, 자신의 눈 속 들보로 인해 흐릿해진 눈이, `형제의 눈 속에 티끌이 있다'고 착각한 것에 다름 아니다. 자신의 눈 속에 있는 들보를 빼내고 정견 할 수 있을 때, 비로소 타인의 눈 속에 있는 티끌을 볼 수 있다. 그리고 그 티끌을 빼라고 말할 수 있으며, 티끌을 빼 줄 수도 있다. 정견이 전제돼야만 참다운 보살행과 이웃사랑을 할 수 있다. 네 눈에 있는 들보를 빼낸 뒤에야, 비로소 네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끌을 제대로 보고 빼낼 수 있다는 예수님의 외침이 귓가를 때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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