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주 잠자리
명주 잠자리
  • 정규호 문화기획자·칼럼니스트
  • 승인 2020.07.28 1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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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단상
정규호 문화기획자·칼럼니스트
정규호 문화기획자·칼럼니스트

 

비 오는 날, 아파트 계단에서 명주잠자리를 보았다.

계절이 계절인 만큼 밀잠자리이거나 고추잠자리 류의 잠자리들은 요즘도 아직 흔하게 만날 수 있으나, 명주잠자리를 보게 된 것이 실로 몇 년 만인가. 이맘때쯤이면 간혹 무심천 주변 아침 산책길에서 검은 날개를 자랑하는 물잠자리를 만날 수 있으나, 최근에는 그 개체수가 크게 늘어난 듯 흔하다.

명주잠자리는 `개미귀신'이라는 이름으로 유충시절을 보낸다. `개미귀신'은 개미지옥을 만들어 먹이사냥을 한다. 건조한 모래 속이나 낙엽 아래, 돌 틈에 2.5~5cm 깊이로 깔때기 모양의 굴을 파서 숨어 있다가 굴에 미끄러져 빠지는 작은 벌레를 잡아먹으며 성충으로 자란다.

내가 콘크리트로 지어진 고층 아파트 계단에서 그물눈 모양의 여린 날개를 지닌 명주잠자리를 발견했다는 것은 근처 어딘가에 녀석이 숨어서 벌레사냥을 했던 개미지옥이 존재했음을 전제로 한다. 우아한 날개와 날렵한 몸체 대신 낫 모양의 매우 가늘고 날카로우며 강력한 큰 턱을 지닌 벌레 킬러 개미귀신이 은밀하게 그 속에 숨어 있었음은 당연한 것이고.

명주잠자리를 발견하고 이토록 반가워하는 것은 우리 주변 생태계가 아직은 견뎌낼 수 있는 만큼 버티고 있다는 대견함에서 비롯된다. 그리고 우리가 미처 살피지 못하고 있는 사이, 명주잠자리의 아름다운 비행 이전에 혐오스럽게 생긴 개미귀신이 떨어질 수 없는 한몸임을 모르는 척하고 있다는 깨달음도 있다.

코로나19가 창궐하면서 인류를 위협하고 있는 사이, 사람만이 지구상의 유일하고 유력한 존재로 착각했던 오만함을 깨닫게 된 것은 그나마 다행이다. 사람들이 바이러스의 위험을 피해 칩거하고 이동을 삼가고 있는 동안 사람이 아닌 자연생태계는 원래의 자리를 찾아 도시로, 물가로 모습을 드러내는데 거리낌이 없다.

자연생태계 중에서 특히 동물들의 이런 움직임은, 그들이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만큼 인간을 무조건 두려워하거나 피하고 싶은 대상으로 여기지 않고 있음을 표현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코로나19 이후 나타나는 야생의 움직임은 인간이 자연생태와 거스르지 않고 공존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임을 알려주는 경고일 수도 있다.

수돗물에서 벌레가 나오면서 온 나라가 야단법석이다. 인간에게 공급되는 수돗물의 모든 정수시설을 점검하면서 벌레와 수돗물의 상관관계를 따지고 있고, 대책 마련에 골몰하고 있다. 인간이 벌레로부터 안전해야 한다는 대책은 그러나 결국 차단이거나 살충, 살균 등 죽이는 일로 향한다.

산간 인접지역은 매미나방 성충이 창궐하면서 사람들을 공포에 떨게 하고 있다. 단양의 한 마을이장이 살충제 대신 불빛을 이용한 포충망으로 제거에 나서면서 화제가 된 이면에는 그나마 익충의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다는 욕망이 있다. 매미나방이 극성을 부리는 원인이 지난겨울의 따뜻한 기후 탓이라는데, 그런 기상이변을 일으키고 있는 주범이 결국 인간이라는 것까지는 생각을 키우지 않으니 반성도 시정도 별로 크지 않다.

명주잠자리는 아름다우면서 흔하지 않으므로 반갑다. 그러나 그 유충을 개미귀신으로 이름 지은 것은, 생긴 것에 대한 혐오적 거부감, 그리고 어리거나 약한 대상에 대한 무자비한 인간의 폭력성과 우월적 지배를 위한 제거 충동의 표현에 해당한다.

익충과 해충, 생김새의 혐오스러움과 그렇지 않음에 대한 인간의 차별은 단호하다. 어디 벌레에게만 그런가. 사람이 사람에 대한 예의나 배려 역시 미추(美醜)와 빈부, 그리고 권력의 크기, 젠더와 사회적 약자에 이르기까지 얼마나 모질고 극성스러운가.

비를 피해 아파트 계단에 숨어든 명주잠자리의 여린 날갯짓은 인간에게 공존을 요구하는 커다란 몸짓이다. 살다 보면 사람도 벌레도 늘 같은 모습일 수 없으니, 모든 생명은 그 자체로 존중되어야 한다. 인간이 모든 생명과 자연에 대한 차단과 차별, 무지막지한 영역의 침범 대신 공생의 윤리가 코로나 이후에는 더욱 굳건해질 수 있을까. 성충이 되면 최고 여섯 달가량 먹지 않고 버틸 수 있다는 명주잠자리가 지켜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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