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적 이념의 벽을 넘은 충신 효자 최유경 선생
정치적 이념의 벽을 넘은 충신 효자 최유경 선생
  • 김명철 청주 봉명고 교장
  • 승인 2020.07.27 20:0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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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역사기행
김명철 청주 봉명고 교장
김명철 청주 봉명고 교장

 

보수와 진보, 수구와 혁명, 구왕조와 신왕조, 권문세족과 신진사대부, 정반대의 이런 상황을 극복하는 인물이 있을까? 그러나 우리 역사에서 이러한 기존의 상식을 뛰어넘는 인물이 있다. 바로 우리 고장 출신의 죽정 최유경 선생이다.

최유경 선생은 본관은 전주이며 자는 경지(慶之), 호는 죽정(竹亭)이다. 우리 고장 진천군 초평면에 그의 흔적이 남아 있다. 이곳 화산리에는 `죽정내'라는 지명이 있다. 지금은 초평저수지라는 거대한 호수가 있지만 과거에는 `내(川)'가 있었다. 선생이 노년에 이곳으로 낙향하여 대나무(竹)로 만든 정자(亭)를 짓고 생활했다고 해서 `죽정내'라는 지명이 유래한다는 것이다. 실제 1872년 진천현 지도에서도 `죽정내'는 `죽정천(竹亭川)'으로 표기돼 있다.

고려말의 최유경은 지금 식으로 표현하면 보수파에 속하던 인물이다. 1372년(공민왕 21) 판도사좌랑이 되어 경제 사범을 적발하고 바로 잡는 일을 했으며, 사헌부장령으로 있을 때는 왕의 총애를 믿고 방자하게 불법을 자행하던 환관 윤충좌를 탄핵했던 강직한 인물이다. 1377년에는 공주목사가 되어 양광도 옥천·보은 등지에서 내륙까지 침략한 왜구를 크게 무찔렀던 인물이다.

이분은 구 왕조였던 쓰러져가는 고려 왕조에 충성을 다했던 분이다. 특히 1388년 요동정벌이 단행되었을 때 서북면전운사겸찰방으로 있으면서 이성계가 위화도회군을 감행하자 그 사실을 우왕에게 알려서 역성혁명을 방해했던 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할 때 개국원종공신으로 녹훈되었다.

위화도회군을 우왕에게 고변한 인물로 반 혁명적인 인물이라 하여 많은 사람의 반대에도, 최유경의 충의를 높이 산 이성계의 칭송으로 개국원종공신에 서훈될 수 있었다. 이성계는 원종공신을 정할 때 반대하는 사람들에게 오히려 최유경의 위화도회군 고변과 구 왕실에 대한 충성심을 높이 사며 오히려 두둔했다는 기록도 전해진다. 사사로운 감정보다는 인물의 됨됨이와 역량을 높이 산 것이다.

1396년(태조 5) 8월 성문제조에 임명되어 서울 도성의 성문 건축의 책임을 맡았는데, 오늘날 세계적으로 자랑할 만한 서울 도성 유산을 남긴 인물이 바로 최유경 선생이다. 이듬해에는 지중추원사로 도체찰사에 임명되어 경기도·충청도 지방을 순회하였다. 태종의 즉위와 더불어 사헌부대사헌이 되었고, 뒤이어 육조와 대간의 천거로 참찬의정부사가 되었으며, 정조사가 되어 명나라에 갔다가 이듬해에 돌아왔다. 그 후 사헌부대사헌과 판한성부사 등에 임명되었으나 연로하신 부친이 병환에 들자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여 `대나무로 만든 정자(죽정)'를 짓고 지성으로 봉양하셨다. 얼마후 부친이 돌아가시자 묘역 앞에 초막을 짓고 3년을 봉양하셨다. 1413년(태종 13) 향년 7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태종 때 청백리에 녹선되었고, 세종 때는 효행으로 정려되었으며, 아들 최사흥도 정려되어 진천군 문백면 구곡리에 최유경 부자 효자문으로 전해 오고 있다. 청주시 청원구 북이면 대율리 최유경 효자비는 2015년 4월 17일 청주시의 향토유적 제141호로 지정되었다.

백성을 위하는 한결같은 마음과 효심으로 가득찬 최유경 선생이 그립다. 그리고 죽정의 인간성과 역량을 인정하고 새로운 왕조에서도 중임을 맡긴 이성계의 안목도 그립다. 두 어른을 만나서 진영의 논리도 치열한 이념의 잣대도 뛰어넘는 비결을 물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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