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동래설에 대하여
기자동래설에 대하여
  • 이창수 시인
  • 승인 2020.07.23 17:57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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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이창수 시인
이창수 시인

 

최근 중국 사학자 주학연이 펴낸 `진시황은 몽골어를 하는 여진족이었다'의 서문 중에 중원中原에 대한 정의가 있다. `중원, 협의의 중원은 일반적으로 하남성 일대를 의미한다, 그러나 광의의 중원은 하남성과 황하 중 하류 인근 성의 일부 지역까지 포괄하는 지역을 가리킨다.'

진秦나라 이전 문헌 `죽서기년'·`상서'·`논어'등에는 기자가 은나라 말기의 현인賢人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한漢나라 이후의 문헌인 `상서대전'은전, `사기'은본기, `한서'지리지 등에는 `기자는 은나라의 충신으로 은나라 멸망을 전후해 조선으로 망명, 조선을 교화시켜 무왕이 기자를 조선에 봉했다'고 변경돼 있다.

범엽의 `후한서'인물열전 공손술편을 보면 공손술의 수하 이웅이 공손술에게 진언하는 장면에서 은나라와 주나라의 땅 너비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지금 천하가 불안하여 민심이 들끓고 있으니 대업을 이루기 좋은 시기입니다. 옛날 은나라 탕왕과 주나라 무왕은 겨우 1백리의 땅을 기반으로 왕업을 이루었는데 지금 장군의 할거지는 1천리에 달하니 탕왕 무왕보다도 훨씬 세력이 강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고 한다.

23세 아홀단군 초에 `웅갈손을 보내서 남국왕과 함께 남쪽을 정벌한 군대가 은땅에 여섯 읍을 설치하는 것을 살펴보게 했는데, 은나라 사람들이 서로 싸워 결판을 보지 못하니 병력으로 쳐부셨다'는 기록이 있고, 은의 멸망이 기원전 1182년, 기자가 서화에 들어온 것이 기원전 1122년, 은멸망 과 기자망명의 시차가 60년, 단군이 사람을 보내 인사한 것이 기원전 1114년 여기서 또 8년 시차가 있다.

앞서 아홀단군 때 남쪽 정벌에서 얻은 서화로 기자가 들어오는 것을 단군이 모르지 않았을 터, 8년 동안 가만히 있다가 갑자기 인사를 했다는 것은 기자를 수하로 보지 않고 손님으로 보고, 그가 사망하니 사람을 보내 문상하려 했으나, 절대중립이 필요한 상주가 단군의 인사를 거절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두예가 말하기를 양국 몽현 북쪽 박벌성 내에 탕왕의 묘가 있고, 그 서쪽에 기자의 묘가 있다. 또 양나라 몽현과 서화는 같은 곳이다'라는 말에 견주어보면 기자는 동래 한 것이 아니라 잃었던 본래의 자기 땅으로 돌아가 수를 다하고 죽은 것이다.

무왕이 무슨 힘이 있다고 기자를 조선왕으로 봉해서 색불루단군의 금 8조를 기자가 가르쳤다 하고, 단군조선을 기자조선으로 교체했다 하며 역사를 사기 친 것이 `기자동래설'이다. 외세를 등에 업고 조국을 농락하던 `홍다구'같은 무리가 있어 가능했던 사기극이다.

고려말 행촌 이암선생은 단군세기 서문에서 “지금 다른 나라 사람들이 우리나라 정치에 간섭이 갈수록 심해져서, 임금을 바꾸고 다시 앉히기도 하며 대신을 저들 마음대로 임명하기도 하는 등, 멋대로 설쳐대고 있어도 나와 같이 나라의 기둥 되는 신하라는 사람들은 손을 맞잡고 앉아만 있을 뿐 그 대책이 없음은 무슨 까닭인가? 이는 바로 나라에 역사가 없으니 모습은 있어도 그 얼이 없어졌기 때문이다”며 탄식했다.

현대는 컴퓨터 통신의 눈부신 발전으로 세계가 한마당에 있어 각국의 눈이 지켜본다.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던 시대는 지났다. 역사는 살아온 행적이라 뜯어고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대륙에서 발굴되는 유물을 중국이 감춘다고 모르지 않을 것이고, 사람들이 쓰고 있는 말 속에 화석으로 들어앉은 어원을 캐면 대륙의 큰 강들을 누비며 살아온 한님 후예의 장구한 역사가 고스란히 드러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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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와 2020-09-27 13:31:42
단군조선은 홍산문명부터 상나라 기자조까지를 일컫는다.
상나라 천자의 칭호가 천간이며 천간은 텬가니 탄구니 단구니 단군으로 동일칭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