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체시대
돌체시대
  • 정명숙 수필가
  • 승인 2020.07.22 1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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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정명숙 수필가
정명숙 수필가

 

아버지 산소 주위에 원추리가 지천으로 피어있었다. 유난히 좋아하는 꽃이라 그 중 한 포기를 캐다 마당 한쪽에 심었더니 해를 거듭할수록 영역을 넓혀 갔다. 고개 숙인 백합이나 나리보다 화려하지 않아도 하늘을 향한 꼿꼿하고 소박한 모습이 눈길을 잡고 발을 멈추게 했다. 꽃이 피기만 기다리던 원추리를 가장이 잔디를 깎으며 잎이 무성해 지저분하다는 이유로 밑동까지 바짝 잘라버렸다. 속이 상했다. 돌이킬 수 없는 일, 타박한 들 무슨 소용인가. 꽃의 기억을 잡고 내년까지 기다릴 수밖에 없다. 마음을 다독이며 섭섭한 마음을 눌렀다. 흔적만 남기고 다시 싹이 돋지 않는다면 얼마나 허망한 일인가.

얼마 전, 문학단체인 청오회의 동인지 `돌체시대 3집'이 발간되었다. 문단의 대 선배님 몇 분과 문화와 관련 있는 분들이 초대되었다. 이십여 명이 모인 조촐한 출간기념식은 나로서는 무척 어려운 자리이면서 영광스런 자리였다. 88세에 이르신 회장님의 발간사를 들으며 마음이 무거워지기 시작했다. 4집 출간은 어렵다고 했다. 분명 축하의 자리인데 분위기가 가라앉기 시작했다. 책을 폈다. 3집 속에는 청주문학의 깊은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돌체시대'는 기다려도 소용없는 정녕 마지막 출간인가. 하늘을 향해 꽃대를 밀어올리던 원추리가 사라져 몹시 안타깝던 일이 문장으로 살아난다.

청오회는 청주에서 50년대 문학을 통해 만난 사람들의 모임이다. 1957년 청주문인협회 창립회원 일곱 분과 그 당시 고등학생들의 문학 동호회인 푸른문 출신들이 1978년 5월에 모임을 가졌다. 일곱 분이 창설한 청주문인협회는 다소 어려움은 있었지만 장족의 발전을 했다. 63년의 시간이 흐른 현재 백 명이 훌쩍 넘는 회원들이 활발하게 문학의 꽃을 피우고 있다. 허나, 기초를 다지고 기둥을 세워 틀을 만들어 놓았던 분들은 대부분 타계하시고 한 분만 고문으로 계신다. 청오회의 동인지 `돌체시대'는 고문으로 계신 분과 푸른문 출신 몇 분만 남아 더 이상 발간할 여력이 없으시다. 천 년 로마도 역사에 큰 발자취를 남기고 사라졌듯이 청오회의 `돌체시대'도 문학의 깊은 역사를 흔적으로 남기고 높이 세웠던 깃발을 내린다. 한평생 문학을 통해 아름다운 인간관계를 맺어 온 소중한 사람들과의 신뢰와 우정에 자긍심을 가졌던 청주문학계의 전설로 영원히 기억해야 할 분들이다.

흔적만 남기고 싹을 틔울 수 없이 사라진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어떤 것도 고정 불변하는 것은 없을 터다. 삶도 시시때때로 마주치는 문제와 더불어 언제나 변화하지 않던가.

원추리는 다시 싹을 내밀고 있다. 내년 여름, 장마가 시작될 때쯤이면 노란 꽃을 피워 발길을 잡겠지만 돌체시대를 다시 만날 수 없다니 존경하는 스승을 잃은 듯 마음이 허허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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