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늦은 전수 조사
뒤늦은 전수 조사
  • 이재경 기자
  • 승인 2020.07.20 1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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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의 주장
이재경 국장(천안)
이재경 국장(천안)

 

1994년 이전 관선 단체장 시절에 시장, 군수들이 가장 겁을 내는 것이 산불과 상수도 사고였다. 산불이 크게 난 지역이나 먹는 물 관리를 잘못해 주민들에게 원성을 산 시장, 군수들은 여지없이 좌천됐다. 승진 인사 때도 불이익을 받았다. 정부가 당시 얼마나 산림 자원을 끔찍이 보호했는지, 또 먹는 물 관리에 엄격했는지를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중앙정부의 관리를 받았던 시장, 군수들은 산불이나 식수 사고가 나면 꾀를 부리기도 했다. 자신이 받을 인사상 불이익을 막기 위해서였다. 대표적인 사례가 산불 발생 면적을 축소하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 부임지에서 산불이 나서 1만평이 소실됐다고 하면 정작 상급 관청인 도청과 내무부에 1000평으로 축소해 보고했다. 직속 상급 관청인 도청 간부를 구워 삶아 중앙에 허위로 축소 보고를 하고 `면피'를 하기도 했다.

기자들에게도 로비해야 했다. 산불 발생 현장에 취재하러 다녀온 기자가 기사를 쓴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경우 그 기자를 찾아가서 기사를 빼 달라고 하거나, “쓸 거라면 면적이라도 크게 줄여달라”고 `읍소'하기도 했다.

산불은 대개 건조기인 3~4월에 많이 발생한다. 그래서 항상 관선 단체장들은 이때만 되면 산불을 막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산불 감시원들을 특별 고용하고, 한식 등 성묘객이 몰리는 날에는 공무원들을 현장에 배치해 산불 방지 캠페인을 하기도 했다. 산불로 진절머리를 내던 어떤 관선 군수는 봄이 오기 전에 고사를 지내기도 했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인천광역시를 비롯해 수도권 지자체에서 잇따라 수돗물에서 유충이 발견돼 주민들을 불안하게 하고 있다. 지난 9일 인천시 서구에서 처음 발생한 유충은 지난 20일까지 민원이 접수된 건수만 500여 건, 유충이 확인된 건수는 166건에 달한다.

주민들은 물론 수돗물로 학생들에게 급식을 공급하는 학교들까지 그야말로 `멘붕'에 빠졌다. 이번 유충 발생 사태는 인천 서구의 정수장 활성탄 여과지에 날벌레가 알을 낳으면서 발생한 깔따구 유충들이 수도관로를 거쳐 각 가정에 유출된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외부에 노출된 여과지에 날벌레들이 드나들며 알을 낳았으나 여과지 소독 공정에서 제거되지 않아 각 가정에 유출된 것으로 보인다는 게 관계 당국의 설명이다. 한심한 것은 초기에 제대로 대응을 하지 못해 불신만 키운 인천시의 `갈팡질팡' 행정이다.

인천시는 지난 9일 처음으로 수돗물에 유충이 나왔다는 민원을 접수했다. 하지만, 이후 13일까지 10건의 추가 민원이 발생했는데도 시장에게 보고는커녕 대책회의도 하지 않았다. 시장 역시 13일에 보고를 받고 하루 뒤인 14일 늑장 대책회의를 열었다. 이 과정에서 일선 학교들에도 제때 사태 발생 사실이 통보되지 않았다.

오죽했으면 인천 시민들이 청와대 청원게시판에 늑장 대응을 한 공무원들을 처벌해 달라는 글까지 올려놓았을까.

민선 단체장 시절이어서 예전보다 더 공무원들의 기강이 크게 해이해졌다는 비판의 목소리가 나올 법하다. 예전처럼 산불이 났다고 선출직 지자체장들의 옷을 벗길 수는 없으니까 말이다. 이번 사태가 발생하자 전 국민이 불안해 하고 있다. 이미 지난 주말 벌써 전국 곳곳에서 유사 신고가 접수되고 있다.

그렇다면, 이건 진즉에 정부가 나서야 했을 문제다. 총리실이 20일 환경부를 닦달해 전국 484곳의 정수장을 대상으로 전수 조사에 나섰다. 늦었지만 다행이다. 하지만, 첫 신고가 접수된 후 무려 11일 만에 이뤄지게 된 전수 조사. 좌천시키고 문책해야 할 공무원들이 한둘이 아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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