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석인(石人)에 대하여
조선시대 석인(石人)에 대하여
  • 윤병화 세경대 교수
  • 승인 2020.07.19 1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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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윤병화 세경대 교수
윤병화 세경대 교수

 

석인(石人)은 명사로 “무덤 앞에 세우는 돌로 만들어 놓은 사람의 형상”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능묘에 설치한 각종 석조물(石造物) 중에서도 신비한 얼굴을 하고 있는 석인은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한국의 미적 아름다움을 널리 알려주고 있다.

석인은 신라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오랜 세월 동안 그 형태가 다양하게 변화해왔다. 왕릉과 사대부 묘에서는 계급 및 권력에 따라 문인석과 무인석을, 민가에서는 마을마다 장승, 벅수, 돌하르방 등을 제작하여 세워놓았다. 시대가 원하는 염원에 따라 복두공복형(?頭公服型)과 금관조복형(金冠朝服型)으로 화려하게 장식한 석인부터 자애를 베풀고 행복한 미래를 약속해주는 친근한 이웃의 얼굴을 한 석인까지 장인의 수천 번 망치질 끝에 석인이 탄생하였다.

석인(石人)은 크게 능묘의 석인과 민간신앙 속 석인으로 구분할 수 있다. 먼저 조선왕릉과 사대부묘를 지키는 문인석과 무인석은 장대한 몸집의 정형화되고 경직된 조형성을 보여주고 있으며, 지역과 시대에 따라 미적 감각을 다양하게 반영하여 자유로운 격식과 기교를 나타내고 있다. 문인석은 머리 위 복두(?頭), 포(袍)로 불리는 옷, 허리띠인 대(帶), 손에 홀(笏), 가죽신인 화(靴)를 갖춘 공복을 착용한 백관의 모습을 하고 있다. 무인석은 무관의 성격을 강하게 표현하기 위하여 문인석에 비해 다소 커진 얼굴과 굵어진 듯한 몸 그리고 약간 길어진 상반신 및 중요한 골격 마디를 강조하였다.

이러한 능묘의 석조물은 삼국시대부터 제작하여 조선시대에는 충효예(忠孝禮)를 위한 유교적 산물로 자리하였다. 따라서 석인은 당대의 시대상을 반영하여 그 흐름을 같이하고 있다는 점에서 미술사적 의의가 크다고 할 수 있다.

다음으로 능묘이외에도 마을의 안팎에 돌장승, 벅수, 돌하르방 등의 석인을 세웠다. 이들 석인은 민간신앙의 발로이며 마을신앙의 대상물로 민중의 수호신 역할을 해왔다. 장승은 솟대, 선돌, 탑, 신목(神木) 등과 더불어 마을의 지킴이로 숭앙(崇仰)을 받는 민간신앙의 대상물로, 지역에 따라 장생, 장성, 벅수(법수, 벅시), 수살(수살막이, 수살목), 옹중석, 우석목 등으로 불렀다. 장승은 동구 밖과 사찰 입구에 세워 외부세계와 소통하는 공간이며 공동체의 수호신을 모시는 한편 풍수지리상으로 결점이 노출된 허한 곳을 메워주는 비보(裨補) 및 수구(水口)막이로 삼았다. 동시에 일부 마을의 장승은 임신을 원하는 부녀자들에 의해 기자신앙의 대상으로 치성을 받기도 하는데 남근(男根)의 생식력에 기인한 민속상의 기자장승, 성기신앙(性器信仰)의 전통과 일맥상통한다.

벅수는 경상도와 전라도에서 장승을 부르는 명칭으로 순 우리말이다. 벅수는 마을, 성문, 방위(方位), 불법(佛法) 등을 수호하는 신상(神像)을 말한다. 남녀를 상징하는 2기가 짝을 지어 마을 입구나 사찰 입구, 성문 앞, 길가 등에 세워졌다. 또한, 제주도민은 신앙을 통해 불모의 자연을 개척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성문 앞에 부리부리한 눈으로 두 손을 모으고 의젓한 자세를 하면서 짓궂은 마귀와 악귀의 침입을 막는 돌하르방을 세워 놓았다. 이들 민간신앙 속 석인들은 자유롭고 천진한 조각 수법으로 따뜻한 인간미를 보여주고 있으며, 마을과 가족의 안녕을 기원하는 대상물이었다.

가장 찬란했던 문화를 지닌 조선 500년의 역사 속에 석인(石人)은 과연 근본적으로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었는지 다시 한번 생각해 봐야 할 시점이다. 자신의 삶 속에서 위안을 얻고 희망을 기원하는 석인을 통해 우리네 어머니의 정(情)과 사랑(愛)을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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