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끗한 마음을 갖자는 뜻을 담은 곳 청주 세심정(洗心亭)
깨끗한 마음을 갖자는 뜻을 담은 곳 청주 세심정(洗心亭)
  • 김형래 강동대교수
  • 승인 2020.07.19 1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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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시선-땅과 사람들
청주 세심정 전경.
청주 세심정 전경.

 

조선시대 정자건축(亭子建築)은 일반적으로 자연을 배경으로 좋은 산수를 찾아 풍광을 즐기며 휴식하는 공간이라는 것은 일반적인 상식이다. 조선시대 성리학자들은 자연을 배경으로 명산 곳곳에 구곡(九曲)을 명명하고 원림(園林)을 형성해 그 속에 성리학적 사고관이 담겨 있는 건축물을 조영했다.

특히, 조선 중기 이후 정치·사회적으로 당쟁과 사화로 인한 은둔과 은거생활이 상당히 많았으며, 관직을 떠나 산천에 파묻힌 사림들은 자신들의 이념과 성리학적 세계관을 점검하려는 의도에서 많은 건축활동을 했다. 또한, 자연을 곁에 두고 건축물을 건립해 좋은 벗과 명인들이 함께 동화되는 것이 당시 성리학자들의 소망이었다.

이중환(李重煥)은 `택리지'에서 청주 상당산성 동쪽지역을 `산동(山東)'이라고 불렀는데, 이 지역에는 계유정난 직후 미원으로 입향한 경주 김씨, 갑자사화를 피해 낭성으로 입향한 고령 신씨, 그리고 기묘사화로 피신하다가 미원으로 입향한 남양 홍씨를 비롯하여 경주 이씨, 의성 김씨·함양 박씨·아주 신씨·보성 오씨·파평 윤씨 등이 세거하면서 문벌(門閥)을 높여왔다.

이들은 풍광이 수려한 주변 명승지에 거의 경쟁적으로 정자를 경영했다. 특히, 서계(西溪) 이득윤(李得胤, 1553~1630)이 설정한 것으로 전해지는 옥화9곡 일대는 유상지(遊賞地)로도 이름난 곳이 많아 곳곳에 많은 누정이 세워졌다.

세심정은 옥화9곡 중 제5곡인 옥화대(玉華臺) 언덕 위에 위치하고 있다. 이중환이 `택리지'에서 “청천창(靑川倉) 서쪽은 신씨(申氏) 마을이고, 남쪽으로 작은 고개를 넘으면 인풍정(引風亭), 옥류대(玉流臺)가 있는데 변씨(卞氏)들이 사는 곳이다.”라고 했는데, 그 옥류대가 옥화대이다. 지금은 함양박씨와 파평윤씨가 세거하고 있다.

이곳은 언덕 밑으로 깊지도 않고 얕지도 않은 물이 흐르고 깎아지른 절벽이 높이 서 있으며, 주위로 고목이 무성해 정자 건축의 입지로서는 천혜의 조건을 갖추고 있다. 주변에는 조선시대의 선비들이 세심정 외에도 청명한 가을 달을 닮은 추월정(秋月亭), 세상 모든 경치를 볼 수 있다는 만경정(萬景亭) 등의 정자를 세웠고 후학을 위해 건립한 옥화서원(玉華書院)이 자리 잡고 있어 그 역사를 자랑하고 있다.

세심정은 인조 24년(1646)에 주일재(主一齋) 윤승임(尹承任, 1603~1687)이 세운 정자이다. 윤승임은 윤사석의 6대손이며, 추월정을 지은 서계 이득윤의 문생이다. 평생 벼슬을 단념하고 스승인 서계선생의 가르침을 따르며 은일(隱逸)했다.

윤사석은 성종때 사헌부집의를 지냈으나 연산군 때 거듭되는 사화로 현인군자들이 희생되는 것을 보고 벼슬을 버리고 이곳으로 낙향하여 만경정을 짓고 만년을 은일한 인물이다. 정자의 이름인 세심(洗心)은 허물을 고치는 것을 비유한 것이다. 즉 마음을 닦고 씻는다는 뜻을 담은 정자다.

세심정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겹처마, 팔작지붕 건물이다. 전면은 장대석, 좌·우측 및 배면은 자연석 기단을 설치하고 그 위에 8각 장초석을 놓은 다음 팔각기둥을 세웠다. 초석 하부는 거칠게 치석하여 둥그런 받침모양을 하고 있으며, 초석이 높게 올라오는 바람에 마루바닥은 초석에 끼워지게 되었다. 가구형식은 1고주 5량가인데, 측면 가구짜임은 북측은 충량을 설치하였으나, 남측은 툇보를 걸어 형식을 달리하였다.

김형래 강동대교수
김형래 강동대교수

 

오랜 세월이 지나 허물어져 옛터만 남아 있던 것을 1867년에 후손들이 중건하였으며, 현재 종도리 장혀에는 1966년에 중수하였다는 상량문 기록이 남아 있다. 세심정은 박대천과 주위로 넓은 들판을 내려다볼 수 있는 풍광 좋은 언덕에 위치한 아담하고 조촐한 정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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