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 쉴 곳’-참회와 갱생
‘숨 쉴 곳’-참회와 갱생
  • 박경전 원불교 청주상당교당 교무
  • 승인 2020.07.16 1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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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은자의 목소리
박경전 원불교 청주상당교당 교무
박경전 원불교 청주상당교당 교무

 

정보화 시대는 인류에게 축복인 동시에 저주도 함께 내려 주었다. 손쉽게 다양하고 많은 양의 정보를 볼 수 있는 편리는 인간의 호기심이라는 본능을 충족해 주지만, 반대로 선입견(편견)과 낙인이라는 부정적 의식을 심어주기도 하는 점에서 그렇다.

정보화 시대의 매개체는 미디어다. 미디어를 자양분으로 삼아 성장해가는 연예인이나 공인들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SNS(소셜 네트워크 서비스)를 통해 누구나 피해자가 될 수 있는 세상이다.

미디어와 SNS로 퍼지는 정보는 사실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사실이 아니라면 더욱 문제이지만 사실이라 해도 그것이 많은 사람의 선입견과 낙인을 만들 때에 아주 위험하다. 잘못을 저지른 것이 사실이고, 법의 심판을 받고 법이 정한 처벌을 받았다고 하지만 다시 대중의 심판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대중의 심판은 법의 심판보다 무겁다. 법의 심판은 정해진 형량과 기한이 있지만 대중의 심판은 낙인이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과거의 잘못이 드러난 몇몇 사람들은 대중의 낙인을 견디지 못하고 자살을 하기도 한다. 안타까운 일이다. 스스로 변할 기회마저 사라진 것이다.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는 속설을 대중은 맹신하고 있다. 필자의 생각이 `잘못을 하면 손가락질을 받아야 한다'는 것에 반대를 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너무 여지가 없다는 것이다. 그 사람이 잘못하였지만 앞으로 반성하고 새사람이 될 수 있다는 믿음이 사라져 가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이다.

얼마 전 미국 인종차별 반대시위의 발단은 백인 경찰이 흑인 남성의 목을 무릎으로 계속 누르며 과잉 진압을 하다가 흑인 남성이 숨지게 된 사건이다. 전 세계적 공분을 일으킨 이 사건에 이상한 여론이 하나 있었다. 그 흑인 남성이 전과자이기 때문에 경찰의 과잉진압이 정당했다는 것이다. 전과자라는 낙인이 이런 말도 안 되는 여론을 형성한 것이다. 전과자는 위험하다는 선입견(편견)과 흑인은 위험하다는 선입견(편견)은 같은 종류의 차별적 오판이다. 무릎에 목이 눌려 죽은 흑인이 경찰을 향해 계속 외친 말은 `숨을 쉴 수가 없어요.'였다. 여지가 없는 세상에서는 숨을 쉴 수가 없다. 자신이 흑인이었기 때문에, 혹은 자신이 전과자였기 때문에 그는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숨을 쉬지 못하면 죽는 것 외에 다른 길이 없다.

필자가 모신 원불교 3대 종법사이신 대산 종사는 누가 다른 사람의 잘못을 이야기하면 듣지 않으려 하셨다. 그래도 기어이 험담을 늘어놓으면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 사람, 이제 다른 사람이다. 다른 사람 되었단다. 새사람 되었으니 다시는 그런 말 마라.”

원불교 교조이신 소태산 대종사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무리 한때에 악을 범한 사람이라도 참 마음으로 참회하고 공덕을 쌓으면 몸에 악한 기운이 풀어져서 그 앞길이 광명하게 열릴 것이요, 아무리 한때에 선을 지은 사람이라도 마음에 원망이나 남을 해칠 마음이 있으면 그 몸에 악한 기운이 싸고돌아서 그 앞길이 암담하게 막히나니라.”

원불교의 스승님들은 모두 한결같이 말씀하였다. `선을 행하고도 남이 몰라 주는 것을 원망하면 선 가운데 악의 움이 자라나고, 악을 범하고도 참회를 하면 악 가운데 선의 움이 자라나나니, 그러므로 한때의 선으로 자만자족하여 향상을 막지도 말며, 한 때의 악으로 자포자기하여 타락하지도 말라'고 당부했다.

참회를 하고 새사람이 되는 일이 쉬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모두가 비난할 때에 비난을 받는 그 사람도 숨 쉴 곳이 필요하다. 숨을 쉴 수 없다고 애원하는 이에게 숨 쉴 곳이 되어 주자. 당신이 `숨 쉴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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