쉬어가(家)
쉬어가(家)
  • 이창옥 수필가
  • 승인 2020.07.15 1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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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이창옥 수필가
이창옥 수필가

 

오랜만에 단비가 내리고 있다. 대지를 촉촉하게 적시는 비를 바라보며 마음은 온통 괴산 밭으로 달음박질치고 있다. 언덕에 방풍림으로 심은 어린 편백나무들은 돌 틈을 비집고 뿌리를 잘 내리고 있을까. 밭 가장자리에 심어놓은 꽃나무들은 며칠 사이 얼마나 자라있을지, 돌 틈새에 심어 놓은 영산홍들은 무사한지 혹시 지난번처럼 누군가의 손에 뽑혀 간 것은 아닌지 걱정도 되었다. 밭 여기저기에 심어 놓은 꽃모종과 나무들의 안부가 궁금해 일은 뒷전이고 비 내리는 밖으로만 눈길이 향했다.

요즘 들어 나는 힘들게 일하다가도 언제든지 찾아가 쉴 곳이 있다는 것이 좋아서 곧잘 콧노래를 부르며 싱글거린다. 남편도 달라졌다. 온몸에 활력이 넘치고 얼굴에 생기가 돌았다. 틈만 나면 도화지에다 그동안 상상만 했던 집들의 모습을 설계하며 짓고 허물기를 반복했다. 남편과 달리 나는 정원을 가꿀 생각에 마음이 두근거리고 온몸이 들썩였다. 먼저 나무를 심을 장소를 정하고 수종 선택을 위해 인터넷을 검색하며 정보를 수집했다. 날마다 꽃과 나무들을 설명해 놓은 책들을 들여다보며 정원의 꽃 지도를 그리느라 분주했다.

그러나 집을 짓고 정원을 가꾸는 일은 시작하기 전부터 어려움의 연속이었다. 임야라 형질변경은 당연하다 생각했었지만 복잡한 절차를 거쳐 변경신청을 한 후에도 산 넘어 산이었다. 임야인 곳에 터를 다지는 일도, 언덕배기에 옹벽을 쌓는 일도 수월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비용지출이 많아 걱정도 태산이었다. 애초에 평평한 밭이나 대지를 샀으면 이런 고생은 안 해도 되었을 거라는 주변 사람들의 은근한 무언의 눈치에도 “우리는 바람에 홀렸던 거야”라며 걱정은 잠시 접어두고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남편은 농막을 짓거나 집을 지으면 이름을 지어주자고 했다. 그러더니 집 설계하듯 날마다 내게 이런저런 이름을 지어 한동안 성가시게 하는 것이었다. 어느 날 “여보. 쉬어 가(家)는 어때?”한다. 누구나 와서 편하게 쉬어가기를 바라는 마음이란다. 어쩌면 남편은 사람이 사는 집에 사람이 자연스럽게 드나드는 집을 구상했을 터였다. 그동안 앞만 보며 치열하게 살아온 남편도 편하게 쉬고 싶은 공간을 많이 그리워했음을 알고 있다. 더불어 두 딸이 결혼해서 아이들을 데리고 와 마음껏 뛰어놀고 편히 쉬었다 갈 수 있는 고향 같은 곳을 만들어 주고 싶은 마음도 있었을 터였다.

쉬어가(家)는 남편과 나의 오랜 소망이었다. 어쩌면 세상을 살아가는 대다수 사람들도 우리와 비슷한 소망을 제각각 지니고 살아가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하루하루를 치열하게 살아내면서 숨 가쁜 날도 있을 터 가끔은 그 가쁜 숨을 내려놓고 편하게 쉬고 싶은 마음이 간절할 것이다. 우리 부부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삶에 의미를 부여하기보다는 굴곡진 삶을 헤쳐 내며 가슴 한구석에 속 울음을 켜켜이 쌓아 올리며 살아냈다. 하지만 남편도 나도 잘 알고 있다. 그때 그 속울음이 쉬어가의 주춧돌이 되었다는 것을.

쉬어가(家)가 지어지고 나무들과 꽃들이 피어나면 누구든 놀러 오시라. 쉬어가(家)에 들거든 부디 아무 생각도 하지 마시라. 그저 편하게 쉬어 가시라. 그리하면 가시는 길 빈손으로 보내지 않으리다. 텃밭에서 갓 뜯은 푸성귀 한 봉지와 꽃 한 송이 정도는 꼭 들려 보내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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