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자의 가치와 산 사람의 미래
죽은 자의 가치와 산 사람의 미래
  • 정규호 문화기획자·칼럼니스트
  • 승인 2020.07.14 19:3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수요단상
정규호 문화기획자·칼럼니스트
정규호 문화기획자·칼럼니스트

 

서울특별시장이었던 박원순이 죽었다. 참 나쁜 죽음이다. 죽음에 좋고 나쁜 차이가 있으랴마는, 그의 죽음이 서러움과 아쉬움, 분노와 절망으로 극명하게 갈리는 세상을 만들고 있으니 결코 좋은 죽음일 수 없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비극이다. 그 비극은 온전히 살아남은 사람들의 몫일 수밖에 없는데, `죽은 자는 말이 없다'는 침묵 또한 비열하다.

명예를 지키려 했다거나, 죽음으로 사죄하려 했다는 미사여구는, 대단히 미안하지만 끝까지 자신만을 순결하게 지키려 했다는 탐욕의 다른 표현에 불과하다.

나는 생전의 박원순을 무척 좋아했다. 순교자처럼 험한 길을 골라 뚜벅뚜벅 걸어가는 그의 모습을 보면서 언젠가 그가 큰 지도자가 되어도 좋겠다는 생각도 했었다. 그런 날이 오면 그로 인해 마침내 이 나라가 진정한 사람 사는 세상을 마주할 수 있겠다는 희망을 품기도 했었다.

그의 실종소식이 속보로 알려지던 날, 그 밤을 나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 변고가 확인된 새벽부터 그가 서울시청을 영원히 떠나던 날까지 불면의 밤은 계속되었고, 극단의 선택에 대한 까닭이 조심스럽게 드러나면서 내 문장의 시제는 과거형이 아닌 과거완료형으로 정상의 틀에서 벗어나고 있다. 스스로 선택한 죽음의 비극으로 박원순은 적어도 나에게 막연한 느낌의 먼 과거이거나, 과거와 뚜렷하게 반대되는 지금에 대한 걱정거리를 남겼다.

인권변호사로 출발해 한국 시민운동의 산증인으로, 최장수 서울시장으로 선택된 박원순의 삶은 `죽은 자의 가치'가 막중함을 인식시키기에 조금도 모자람이 없다. 사회적 약자의 삶이 실질적으로 개선되기를 간절하게 바랐고, 과감하게 실천했던 그의 `혁신'과 `소셜 디자인'은 거대도시 서울이 국민의 절반에 가까운 시민을 품으며 더불어 살아갈 수 있는 새로운 길을 제시한 이정표로도 충분하다.

2018년 3선의 마지막 서울시장으로 취임하면서 곧바로 강북구 삼양동의 옥탑방 한 달 살 이를 통해 서울시민의 낮은 삶으로 뛰어든 그는 “도시 가장자리로 밀려났던 시민들의 삶과 꿈을 회복시켜 드리려고 했던 시간”을 정성껏 보내려고 했다.

제도권의 바깥에서 `참여민주사회'를 가치 기준으로 삼아 행정과 권력의 감시에 집중했던 시절, 그는 국민생활의 최저선 확보, 공익 제보자 지원, 부패 정치인 낙천과 낙선운동, 재벌개혁을 위한 소액주주 권리 확보 등을 위한 시민행동에서 항상 맨 앞자리에 있었다. `1% 나눔'운동을 통해 한 부모 여성지원, 독거노인 생계비 지급, 미숙아 치료 등을 위한 모금 등 기부문화의 확산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도시의 현장성에 대한 성찰은 `희망제작소'를 통해 거리의 무질서한 간판문화 개선, 높이를 낮춘 손잡이와 노인 등 교통 약자 배려석 도입 등의 시민 생활에 밀접한 발상으로 낮은 곳으로 향하는 서울과 서울시민에 대한 따뜻한 시선을 언제든 거두지 않았다.

학교 무상급식, 대학 반값 등록금, 청년수당, 역세권 청년주택,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태양광 등 친환경 에너지, 노동이사제 등 서울시장의 제도권 안에서 그가 창안하고 실천한 가치는, 그의 죽음으로 인해 멈추거나 후퇴를 걱정하는 살아남아 있는 시민과 미래에 대한 비극이다.

가장 커다란 비극은 그렇게 낮은 곳의 사람에게로 일관되었던 죽은 자의 가치가 순식간에 무너지거나 부정될 수 있다는 것이다. 어쩌면 우리 사회에서 앞으로 영원히 도덕성을 갖춘 권력을 기대하는 것이 불가능할 수도 있다는 절망도 무리는 아니다.

고 박원순 서울시장을 성추행 혐의로 고소한 서울시 직원은 “거대한 권력 앞에서, 공정하고 평등한 법의 보호를 받고 싶었다”고 호소하고 있다. “진실을 왜곡하고 추측이 난무하는 세상을 향해 두려운 마음”이며,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까”를 걱정한다. 개인의 인권을 무너뜨리며 고통스럽게 했다는 피해자의 주장은 대단히 충격적이다. 원순씨의 시민 중심의 행정은 객관화된 낮은 곳의 집단에만 가려가며 흐르는 또 다른 계급주의인 것인가.

개인을 고통에서 헤어나지 못하게 하고 절망하게 만드는 도덕의 붕괴에서 사회와 집단의 희망은 만들어질 수 없다. 죽음이 진실까지 가져갈 수는 없다. 도덕 역시 죽음으로 대신할 수 없으니, 다만 살아남은 사람들의 미래를 위하여 원순씨의 명복을 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