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산의 충열문 앞에 서서 전통을 생각하다
옥산의 충열문 앞에 서서 전통을 생각하다
  • 김명철 청주 봉명고 교장
  • 승인 2020.06.29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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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역사기행
김명철 청주 봉명고 교장
김명철 청주 봉명고 교장

 

조선시대 국가사회적인 이념은 유교였다. 유교 이념은 나라에 충성하고, 부모에 효도하고, 남편에게 열을 다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충·효·열의 정신을 강조하고 널리 알리는 의미에서 전국 각지에 정려 건물을 세웠던 것이다.

정려 건물은 충신각, 효자각, 효부각, 열녀각 등으로 나누는데 건물 본연의 기능이 배제된 일종의 기념성을 지닌 건물이기 때문에 다른 유교 건물과는 다르게 건물의 구성이 1개동이며 어느 지역에 가든지 식별이 가능한 독특한 외관과 장소성을 지니고 있다.

진천의 만뢰산에서 발원하여 무심천으로 흐르는 병천천이 국사봉을 휘감고 지나가며 만든 옥처럼 아름다운 평야를 만들고 있다. 그래서 이름도 `옥산(玉山)'이다. 이곳 옥산면 덕촌리에 독립운동가 마을을 찾아가는 길목에 커다란 비석과 함께 고색창연한 옛집 하나가 있는데 바로 `하동정씨열부문'이다.

비석은 `하동정씨부사직공파세천비'라 하는데 세천비는 조상의 묘소 입구나 근처에 세워 선조의 치적을 자랑하는 내용을 기록하면서 문중의 선산임을 나타내는 비석이다. 다른 말로는 세촌비라고도 한다. 아마도 하동정씨 문중에서 조상의 자랑스런 업적을 남기기 위해 세운 것으로 보인다.

이 비석 뒤에 서 있는 열부문(충열문)은 정면 1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 목조기와집으로 정려의 사면을 홍살로 막고 안에는 열녀문 편액을 걸었다. 이 건물 주인공은 임진왜란 때 의병을 모집하여 왜군에 대항하다 순국한 정검과 열녀로 후세에 이름을 남긴 그의 아내 충주 지씨다.

정검은 임진왜란이 일어나 나라가 풍전등화의 위기 순간에 왜군이 청주로 쳐들어온다는 소식을 듣고 국란에 나라를 위해 나아가 싸우는 것이 신하된 자의 도리라고 말하며 의병을 모집하였다. 옥산에서 왜군에 대항하여 전투를 하였으나 중과부적으로 밀리고 왜군이 항복을 강요하자 어찌 왜적에게 항복하여 굴욕적인 삶을 살겠느냐하고 끝까지 싸우다 순국하였다.

또한 그의 아내 충주 지씨는 왜군이 쳐들어오자 옥산면 치알봉으로 피난하였다가 왜적에게 발각되어 그의 미색을 탐한 왜군이 희롱을 하자 왜군의 무례함을 꾸짖고 자결하여 남편의 뒤를 따랐다고 한다. 이때 충주 지씨의 나이 28세였다. 이러한 정검 내외의 충절을 기리어 철종임금이 왕명으로 정려하고 후세에 길이 전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그 내용이 삼강편에 기재되기도 했다 두 분의 묘소는 마을 뒷산에 안장되어 있다고 한다.

전통이란 세대에서 세대를 걸쳐서 가치 있는 것으로써 보존되고 전승되어 온 사회적 유산이다. 공동체 모두의 유지와 발전에 도움이 되는 가치에 대한 신념인 것이다. 나라와 민족이 어려움에 처했을 때 목숨을 걸고 헌신하는 모습은 시대를 넘어 후손들에게 남겨야 할 전통이라는 엄숙한 경고가 들려오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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