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험한 선례
위험한 선례
  • 권혁두 기자
  • 승인 2020.06.28 1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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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논단
권혁두 국장
권혁두 국장

 

“국회가 법원행정처장을 불러 유력 정치인에 대한 확정판결을 비판한 것은 굉장히 위험한 선례가 될 수 있다”. 지난 23일 국회 법사위에서 펼쳐진 장면을 두고 김한규 전 서울지방변호사회 회장이 했다는 말이다. 조재연 법원행정처장이 출석한 자리에서 민주당 의원들은 돌아가며 한명숙 전 국무총리를 유죄 판결한 재판에 문제를 제기했다. 민변 출신 권경애 변호사는 민주당 의원들을 `친모 누명 벗기겠다고 광기에 사로잡혔던 연산군의 환관들'로 비유하며 “삼권분립이고 재판 독립이고 눈에 뵈는 게 없는 모양이다”고 격앙했다.

이미 확정된 판결을 사실상 무효화 하고 다시 재판을 여는 게 재심이다. 사법부 스스로 판결의 문제점을 인정해야 하기 때문에 그 사유는 엄격히 제한된다. 판결로써 확정된 증거 위·변조, 허위 증언, 무고 등이 근거로 제시돼야 가능하다. 재판 당사자나 법률 대리인 등이 청구하는 것이 상례다. 그러나 한 전 총리는 결백을 주장할 뿐 아직 재심 청구에 대해서는 입장을 내지않고 있다. 당사자는 뒤로 물러나 있는 데 제3자인 민주당이 나서 재심의 불가피성을 제기하고 법원을 압박하는 모양새다. 법치주의와 삼권분립의 정신이 훼손되고 있다는 비판이 터지는 이유다.

판사들 스스로 가장 수치스러운 과거사로 꼽는 것이 박정희 집권기인 1975년을 일찍 저물게 한 인혁당재건위 사건 판결이다. 당시 대법원은 북한의 사주를 받아 정부 전복을 기도한 혐의로 기소돼 사형을 선고받은 8명의 상고를 기각했고, 바로 다음날 사형이 집행됐다. 중앙정보부는 이들에게 무자비한 고문을 가하고 조작된 혐의를 씌웠다. 법정에서는 재갈을 물려 반론권을 박탈했다. 당시 법원은 눈에 보이는 진실조차 외면하고 권력의 위협에 굴복했다. 희생자들이 재심 절차를 거쳐 2007년 대법원 무죄 판결을 받기까지 32년이 걸렸다. 너무도 늦었지만 그나마도 유가족과 그들을 돕는 시민단체들이 고단하게 이어간 행군의 결과였다. “당신들은 가만히 계시라”며 절차를 떠맡아준 준 정당이나 정권은 없었다. “대법원 판결이 억울하다면 당사자가 재심을 청구해 누명을 벗으라”는 권 변호사의 일갈은 너무도 당연하게 들린다.

위험한 선례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추미애 법무장관은 며칠 전 민주당 초선의원들과 만나 윤석열 검찰총장을 거칠게 비난했다. 그는 “장관 말을 겸허히 들으면 좋게 지나갈 일을, 지휘를 한답시고 일을 더 꼬이게 만들었다”고 말했다. 웃음을 가득 품은 득의만만한 표정이었다. “검찰총장이 내 지시를 절반 잘라먹었다”고도 했다. 구사한 언어의 품격에 대해서는 “전반적으로 표현이 너무 저급하고 신중치 못하다”는 정의당 논평으로 대신하겠다.

정작 심각한 것은 그 내용이다. `검찰총장은 법무장관 말을 겸허히 듣고 따라야 한다'는 추 장관의 단언은 오도될 여지가 크다. 검찰청법은 총장의 임기를 2년으로 보장하고 법무장관도 개별 사건에 대해서는 총장을 통해서만 지휘·감독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정치권력의 개입을 제한해 검찰의 중립성을 보장하려는 장치이다. 물론 윤석열 총장이 법무장관의 지휘권 발동을 자초한 점을 부인할 수는 없다. 검·언유착 의혹에 휩싸인 최측근 한동훈 검사장의 감찰에 제동을 걸려는 구체적 정황이 여럿 포착됐다. 대통령의 가신을 엄혹하게 수사했다면 자신의 측근에 대해서는 더 냉정했어야 했다.

그렇더라도 윤 총장의 과실이 검찰을 법무장관 지휘권에 오로지 귀속시키는 구실로 남용돼서는 안된다. 많은 국민은 살아있는 권력에 무력했던 검찰이 어떤 재앙을 초래했는 지 기억하고 있다. `검찰총장은 법무장관에 겸허하라'는 추 장관의 발언은 훗날 어느 정권이 불순한 의도를 갖고 차용할 가능성이 있는 위험한 소신이자 선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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