밑반찬
밑반찬
  • 이은일 수필가
  • 승인 2020.06.23 1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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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이은일 수필가
이은일 수필가

 

삼시 세 끼 밥상 차리는 일은 여전히 어렵다. 이럴 때 미리 시간을 내서 각종 절임류와 마른반찬, 조림 반찬 등을 준비해 두면 요긴하게 쓸 수 있다. 밑반찬만 있으면 그때그때 생선을 굽든, 국이나 찌개를 끓이든 반찬 한 가지만 더해서 재빨리 밥상을 차려낼 수 있기 때문이다.

휴대폰이 없었던 시절의 얘기다. 남편 직업이 수의사인데, 그 당시엔 목장도 많았고 전위(轉位)수술 잘하는 젊은 수의사로 입소문도 나서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매일 목장에서 걸려오는 진료 전화를 받아 남편에게 전달하는 일이 나의 중요한 업무 중 하나였다. 전화를 받으면 그 목장의 전화번호를 찍어 남편에게 삐삐를 쳤다. 급한 상황일 때는 전화번호 뒤에 `82(빨리)'를 붙이는 것이다. `8282'가 뜨면 남편은 그 일을 최우선으로 해결하곤 했다. 지금 같은 시대에는 낯선 얘기지만 그땐 그랬다.

왕진 요청 전화는 주로 새벽에 많이 걸려왔다. 휴일도 없는 일이고 응급 진료가 있으면 한밤중이라도 왕진을 나가야 했다. 식사도 제시간에 못 하면서 일에 치여 살았다. 목장에서 목장으로 왕진을 다니다가 집 근처를 지나게 될 때 잠깐 들어와 허겁지겁 허기를 채우고는 바로 또 나가야 했으니까. 그래서 밥통에는 항상 밥이 있어야 했다. “5분 후에 도착하니까 밥 차려놔.” 생각해 보니 그땐 남편도 나도 매일 5분대기조처럼 살았던 것 같다.

오일장에서 열무를 사다가 다듬고, 절이고, 양념을 갈아 물김치 한 통 담그는 일이 무슨 예술작품을 창작하는 일이라도 되는 양 한나절씩 진을 빼던 시절, 한참을 조물조물해 콩나물 한 접시를 무쳐 놓으면 젓가락질 몇 번으로 흔적도 없이 사라질 때의 허무함이란. 하지만 대단한 요리가 아니어도 맛있게 잘 먹어주는 게 고마웠고 고생하는 남편 생각해서 열심히 음식을 만들었었다. 가끔 어머님이 김장김치와 여러 가지 밑반찬을 보내주셨는데 보자기를 풀어 보면 오이장아찌, 깻잎장아찌, 마늘종 절임 등 구세주 같은 반찬들이 나왔다. 그게 얼마나 반가웠는지 모른다.

밑반찬이 맛있고 주인장의 인심까지 후해서 자꾸 찾게 되는 집이 있다. 늘 맛깔스런 밑반찬을 정성껏 준비해 두는 그 단골집은 항상 손님이 넘쳐난다. 사람도 볼수록 좋고 오래 같이 있고 싶은 사람이 있듯이 마음 바탕이 훌륭한 사람 옆에는 늘 좋은 인연으로 북적거리게 마련이다. 좋은 사람을 만나고 싶다면 내가 먼저 좋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 마음의 밑반찬을 준비해야 하는 분명한 이유다.

중용에 `성실함이란 스스로 자기 자신을 이루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이외의 것들도 이루게 한다.'라고 했다. 선친께서도 살아생전 `정심성의(正心誠意)'를 애써 가르치셨고, 그래서 나는 우선 `성실'이라는 마음 반찬을 준비하려고 한다. 넉넉하게 마련해 두고 한때라도 떨어지는 일이 없게 할 생각이다. 영어 공부도 계속하고, 뜻이 같은 문우들과 함께 여러 분야의 책을 두루 읽어 폭넓은 지식을 쌓고, 혜안(慧眼)을 기르며, 글쓰기를 통해 항상 자신을 돌아보는 일도 게을리하지 않고 있다.

생활 속 거리 두기로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아진 요즘 나는 영혼의 밑반찬을 마련하는 일로 분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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