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간, 보다 인간
공간, 보다 인간
  • 정규호 문화기획자·칼럼니스트
  • 승인 2020.06.23 1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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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단상
정규호 문화기획자·칼럼니스트
정규호 문화기획자·칼럼니스트

 

다시, 한반도라는 지정학적 공간에 시퍼렇게 날이 벼려지고 있다. 전쟁을 잠시 멈추고 있는(정전)상태의 개성과 비무장지대에서의 긴장이 커지는 가운데 6.25 한국전쟁 발발 70주년을 맞고 있다. 남과 북이 함께 시용하고자 했던 남북공동연락사무소가 졸지에 폭파됨으로써 촉발된 공간의 해체는 시간을 거슬러 인간에게 위협과 우려를, 그리고 실망과 걱정을 동시에 만들고 있다. 힘들고 어렵게 만들어 온 남과 북, 한반도와 동북아의 평화를 향한 도전은 북한의 무모한 남북공동연락사무소 폭파로 인해 대결과 고착 상태로 되돌아갔다.

헤어나기 힘든 북한 내부의 속사정과 북한과 미국의 대화 불발 및 미국이 주도하고 있는 국제사회의 대북제재 해소 미해결 등을 원인으로 진단하는 전문가 집단의 복잡하고 궁핍한 언어는 달라진 것 없으니 다만 공허할 뿐이다. 상실은 그만큼 크고 70년이 지나면서 아물 것 같던 상흔은 고스란히 되살아나면서 고통의 크기를 키우고 있다.

분단 85년, 한국전쟁 70년을 지나는 동안 한반도에 남과 북이 함께할 수 있는 공간은 없었다. 비무장지대는 인간이 접근할 수 없으므로 실체 없는 공간이다. 이를 경계로 대립의 시간을 거듭하면서 전쟁의 상처는 70년을 견뎌왔다.

남북공동연락사무소는 분단의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남과 북이 평화와 번영으로 가는 역사적 시험의 장소였다. 그리고 우리 모두는 북한 땅 개성에 어렵사리 마련된 남북공동연락사무소가 시공(時空), 즉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우리 민족끼리 마음의 구성물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 했다. 그 기대에는 남과 북이 함께 만드는 평화와 번영, 그리고 통일의 역사가 담길 것이라는 꿈에 부풀기도 했다.

그리고 다시 비무장지대에 설치되고 있다는 대남 선전용 확성기와 삐라 살포의 극한 대립에는 최소한의 물리적 효용성이거나 인간에 대한 배려는 존재하지 않는다.

아무리 성능 좋은 확성기라 할지라도 그들의 허튼소리를 귀담아 들을 남녘 사람들은 없다. 넘쳐나는 가짜뉴스도 신물 나는데 비난과 위협이 넘치는 선전은 북한 정권의 우매함과 불신만을 확인시켜 줄 뿐이다.

폭파와 무장, 좁고 공허한 비난과 위협의 언어와 행동들로 힘들고 어렵게 만들어 놓은 인간의 공간은 허무하게 무너지고, 다시 우리는 고립의 세상과 맞서 싸워야 하는 고난의 시간을 만나고 있다.

프랑스 철학자 가스통 바슐라르는 <공간의 시학> `안과 밖의 변증법'을 통해 “단순한 기하학적 대립은 공격성으로 물들게 된다. 형태상의 대립은 평온하게 머물러 있을 수 없는 것”이라고 진단한다.

“표현되지 않은 말들의 완성되지 않고자 하는 의도의 그 `지긋지긋한 안-밖' 속에서, 존재는 자신의 내부에서 제 허무를 서서히 소화한다. 뜬소문들에서 들리는 존재의 소음은 공간과 시간 속에서 멀리 퍼져 나간다. 영혼은 마지막 남은 힘을 긴장시키지만, 헛된 일이다.”라는 바슐라르의 말에서 남이든 북이든, 삐라와 확성기의 한계와 헛됨이, `광장 없는 밀실'과 `밀실 없는 광장'이 뫼비우스의 띠처럼 무한 대립되는 곡절을 만들 수도 있다.

쉽지 않은 일이다. 우리 스스로의 힘만으로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고, 남과 북이 의기투합할 수 있는 인간으로의 세상을 만들기에 70년의 상흔과 고착된 이데올로기의 골은 너무 깊고 뚜렷하다.

다시, 최인훈의 소설 <광장>을 떠올린다. “애당초 이게 아닐텐데, 이런 게 아니지 하는 겉돎이 앞선다. 삶이 시들해졌다고 믿고 싶지 않다. 왜냐하면, 그는 부지런히 무엇인가를 찾고 있었기 때문에, 다만 탈인즉 자기가 무엇을 찾고 있는지 저도 모른다는 것이고, 자기 둘레의 삶이 제가 찾는 것이 아니라는 낌새만은 분명히 맡고 있다는 게 사실이다.”

한국전쟁 70년, 공간은 무너졌다. 다시 공간을 만들겠다는 의지는 아직 버릴 수 없다.

남북관계를 소설 <광장>의 마지막 문장, “… 다른 데로 가버린 모양이다”처럼 허무하게 끝낼 수는 없다.

위태롭지만 그런대로 70년 종전의 시간을 견뎌왔던 우리. 어찌됐든 남과 북은 만나야 한다. 이제 공간보다 인간이 먼저인 만남은 어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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