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심고을 충주와 6·25 당시 7연대
중심고을 충주와 6·25 당시 7연대
  • 조준형 충주전통문화회 고문
  • 승인 2020.06.22 1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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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조준형 충주전통문화회 고문
조준형 충주전통문화회 고문

 

금년 6월은 6·25남침 70주년이 되는 해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에 북한은 소련제 T-34탱크를 몰고 기습 남침을 하였다.

미처 대비하지 못한 아군은 계속 밀려 후퇴를 하다가 충주 동락전투에서 최초로 승리하였다.

그때 동락초등학교에는 충주사범학교를 졸업한 김재옥 여사가 있었다.

그녀는 충성심으로 기지를 발휘하여 학교 교정에 주둔한 북한군에게 `이 근방에는 국군이 없다'고 안심시키고서 국군이 주둔한 지역으로 달려가 아군 7연대에게 제보를 하였다.

7연대가 적군을 포위하며 북한군 15사단 48연대를 기습공격하여 전과를 올렸다. 그곳에서 노획한 박격포, 장갑차, 직사포 등의 무기가 전부 소련제로 확인됨에 따라 UN군(60개국)이 참전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 전투에서 승리한 7연대는 충주시 문화동의 현 이마트 자리에서 1947년 7월 15일에 창설된 부대이다.(당시는 정부가 수립되지 않아 국방경비대라 불렸음) 7연대는 6사단의 뿌리이며 장남이다.

대원들은 대부분 충주의 청년들이다. 당시는 삶이 어려웠던 시대라 먹여주고 입혀주고 재워주면서 국가에 충성할 수 있다는 애국심에서 현지 입대자가 많았던 것이다.

지금은 세계 230개 나라에서 잘 사는 나라로 10위권에 들어 있지만, 당시는 북한보다 못살면서 하위 10위권에 들었던 나라였기에 국력이 약한 국군은 계속 밀릴 수밖에 없었다.

낙동강까지 밀리며 후퇴를 하게 되던 중 UN군 사령관인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9월 15일)에 힘입어 용맹스러운 7연대는 북진에 북진을 거듭했다.

10월 22일, 평양 동북방 100㎞ 지점에서 중국의 마오쩌둥과 소련의 스탈린이 김일성에게 특수 제작하여 선물한 소련제 리무진(ZIA110)을 7연대가 노획하게 된다.(전쟁기념관에 전시 중)

또한 7연대는 국군과 UN군 어느 부대도 가보지 못한 한만 국경인 초산 땅의 압록강에 제일 먼저 다다라 감격한 나머지 압록강 물을 수통에 담아 이승만 대통령에게 보냈다.

6.25전쟁 중에 잘 싸운 부대로 1위는 6사단(7연대) 천성부대, 2위는 1사단 전진부대, 3위는 해병대로 꼽히는데, 7연대는 충주의 자랑인 충주의 아들들이었다.

그래서 충주는 충성 충(忠)자가 들어 있는 충성스러운 고을이며 대한민국의 중심고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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