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무모함의 순수
붉은 무모함의 순수
  • 배경은 단재기념사업회 사무국장
  • 승인 2020.06.21 1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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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가는대로 붓 가는대로
배경은 단재기념사업회 사무국장
배경은 단재기념사업회 사무국장

 

살다 보면 `시간이 약이다'라는 말을 종종 쓰고 조언도 하고 스스로에게도 그렇게 위로한다. 시간이 지나면 많은 것이 잊히고 없어지기도 한다고 말이다. 실제로도 그렇다. 자연스럽게 사그라질 감정이나 관계로 힘들어하다 정작 더 좋은 것을 놓치는 때도 있다. 그리고 모든 일엔 양면성이 있으므로 빛과 어둠은 공존한다. 예전부터 집에 있던 책인데 그때는 아무 감흥 없던 줄거리가 신 새벽 베란다 책 읽는 의자에 앉아 책꽂이를 뒤지다 찾은 보석 같은 책이 있다. 칼데콧 아너 상도 받은 책이다. `아놀드 로벨'이 그리고 `첼리 두란 라이언'이 쓴 『힐드리드 할머니와 밤』이다. 무채색의 흑백 그림인데 펜으로만 그려서 주인공 얼굴의 변화를 잘 읽을 수 있고 집중도 높은 책이다.

이야기의 줄거리는 밤을 싫어하는 할머니가 별의별 방법을 다 동원해서 밤을 없애려고 하는 것이다. 즉, 밤새 밤과 싸운다는 얘기다. 왜 할머니가 밤을 싫어하는지 알 수는 없다. 해님이 언제나 오두막을 비춰주길 바라는 마음 하나로 이렇게 가열 차게 밤과 싸우다니. 밤을 싹싹 쓸고, 북북 문지르고, 박박 비비고, 탁탁 털어내도 밤은 그대로다. 자루 안에 쑤셔 넣으려다 실패하고, 큰 가마솥에 불을 지펴 밤을 끓여 김으로 날려 보내려고 한다. 밤을 국자로 퍼내고 휘휘 젓고, 태워버리려 해도 밤은 꿈쩍도 하지 않는다. 심지어 밤을 친친 감아 꾸러미로 엮어 시장에 내다 팔려고도 한다. 가위로 자르려고도 하고 늙은 사냥개에게 삼키라고 던져주기도 하지만 그것도 실패한다. 회유책인가, 할머니는 밤에게 자장가를 불러주고 우유도 한 사발 준다. 그리고 끝내 무덤을 파서 묻으려고 한다. 여러분은 어떤가, 밤이 할머니의 바람대로 없어졌을까? 물론, 어림도 없다. 나중에 화가 난 할머니는 밤에게 퉤-하고 침도 뱉었다.

우리는 다 알고 있다. 밤은 그저 기다리면 사라지고 해님이 오신다는 것을. 굳이 싸우려 하지 않아도 시간이 지나면 밤은 간다. 엉뚱한 할머니의 이야기를 통해 정작 싸워야 할 게 무엇인지 생각해보게 한다. 할머니는 사랑하는 해님이 떠오를 무렵 밤과의 싸움에 지쳐 잠이 들고 만다. 그리고 다시 저녁이 되면 할머니는 밤과 싸울 준비를 할 것이다. 하지만 할머니의 힘찬 에너지와 최선을 다해 자기가 생각한 일을 해내려는 태도엔 존경을 표하고 싶다. 또한, 높은 언덕에 혼자 사는 할머니의 소통 부재가 아무것도 아닌 것을 상대로 전투를 벌이는 것 같아 마음이 짠하다. 결국, 할머니는 해가 떠오를 때 잠에 빠져드느라 자신의 오두막에 찬란한 햇빛이 비치는 것을 보지 못한다. 더불어 펜으로 그린 그림은 할머니와 밤의 팽팽한 긴장감마저 들게 한다.

그러나 할머니를 어리석다고 말할 수 있을까, 우리는 함부로 싸우지 않는다. 지성인이고 문화인이기보다는 껄끄러움을 만들고 싶지 않아서다. 좋은 게 좋다는 걸 우리는 알고 있기 때문이다. 가끔 이런 할머니의 순수함과 무모함이 부러울 때가 있다. 시간이 우리를 야위게 해도, 뻔하게 지더라도 내 가슴에 태우는 촛불을 끄고 싶지 않을 때가 있다. 못 먹어도 `고고'를 외치며 붉은 피가 되고 싶을 때가 있다. 뒷부분에 `작품에 대하여'라는 짧은 글은 잠자기 싫어하는 어린이를 위한 그림책이라고 말하지만, 밤과 싸우는 할머니의 힘찬 이야기는 시지푸스의 바위처럼 무모하지만, 자신의 상황에 지지 않고 끝까지 싸우는 전사의 얼굴을 하고 있는 것만 같다. 나는 지금 무엇과 전투하고 있는가. 그리고 나는 얼마나 붉은 무모함을 갖고 있는가. 지천명의 나이에 생각이 갑자기 많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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