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리 펴고 지나는 길
허리 펴고 지나는 길
  • 안승현 청주문화재단 문화산업1팀장
  • 승인 2020.06.16 1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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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주알 고주알
안승현 청주문화재단 문화산업1팀장
안승현 청주문화재단 문화산업1팀장

 

겨울도 아닌데, 아침 출근 시간이면 차 시동을 건다. 현차 문을 닫아 놓고 차에서 몇 보 떨어진 곳에 자리를 잡는다. 이내 담배에 불을 붙이고 한 모금 길게 빨고, 긴 숨과 함께 내뿜는다. 숨이 막힐 정도의 더워진 공기도 아닌데, 굳이 창문을 닫고 에어컨을 틀어댄다. 시동 걸린 차에서 뿜어내는 배기가스는 숨을 쉬기에도, 배속을 뒤집을 만한 역겨운 냄새다. 그러고도 모자라 아이들이 등교하는 길목에 서서 담배를 피워댄다. 한참 지나 그 자리에서 담배꽁초를 발로 짓이기고 자리를 뜬다. 보다 못해 성질을 못 이기고 한마디 한다. “피운 담배꽁초는 가져가셔야죠?” 답변은 없다. 힐끗 쳐다볼 뿐.

밤낮을 가리지 않고 우우우웅, 웅웅거리는 실외기 소리, 실외기의 팬 소리와 실외기 선반에서 날카롭게 들려오는 소리가 신경을 거슬리는 건 오래전부터였다. 어느 방의 창문을 열어도, 현관문을 열고 뜰로 나가도, 대문을 열고 나가는 시간에 소형인공물이 만들어내는 소리다. 얼마나 열 받은 일이 많았기에 종일 틀어대는 것인지, 주변이 온통 실외기 소리다.

외출을 하고 집에 돌아와 가장 먼저 하는 일은 자물쇠도 없는 대문을 활짝 열고, 현관문의 비밀번호를 눌러 열어젖히고, 방방마다 설치된 창문 하나하나를 여는 일이다. 온종일 닫힌 공기를 환기시키고 주변에 욕심껏 심어놓은 풀들의 내음을 들이는 일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젠 늘어난 실외기의 소리와 열기가 집 주변을 에워싼다. 그러고도 모자라 이젠 주변의 새소리마저 실외기 소리에 음색을 잃어간다.

5월 하반기부터 시작된듯하다. 작든 크든 공간이라는 공간은 모두가 밀폐된다. 들어가는 사람은 가끔 눈에 띄는데 그 안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전혀 알 수 없는 상황이다. 전에는 옆집에서 싸우는 소리, 아이들이 할아버지 집에 놀러 와 뛰어다니고, 재잘대던 소리에 사람 사는 동네라 생각되었는데, 이젠 들어가고 나오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들리지가 않는다. 밀폐된 공간에 들어가고 이내 새어 나오는 소리는 요란한 실외기다. 우우우웅, 웅~~~,덜덜덜더얼~~, 건조한 열기를 더해서.

한여름도 아닌데, 어느 방향의 한 창문만이라도 신선한 공기를 통과시켜주었으면 하는 바람이 간절해진다. 그나마 건물이 없는, 서향이긴 하지만 학교 운동장 쪽으로 난 거실 창문이 있어 다행, 앞쪽으로 뜰이 있어 시원하고 상큼한 내음과 새소리를 들인다. 가끔은 학교 앞 등교하는 아이들과 행인들에 시선을 둔다. 할아버지 할머니 손을 잡고 가는 아이, 엄마 뒤꽁무니를 열심히 쫓아가는 아이, 그 사이사이 얼마 전부터 대형 원룸공사를 하며 새참을 먹으러 가는 인부들이 뒤섞인다. 새참을 먹고 공사장으로 돌아오는 인부들의 손에는 종이컵과 불이 달려진 담배 한 개비. 그리고 그들이 지나간, 학교 허리도 안 되는 나지막한 담장 위에는 담배꽁초가 진열된다. 굵기도 길이도 종류도 다양한 담배꽁초가 편의점 못지않게 잘 놓인다. 매일 새벽, 저녁으로 치워도 진열대의 상품(?)은 비는 일이 없다. 수량조절만 있을 뿐.

아침 7시가 지나면, 동네 어르신들이 모여 청소를 하신다. 허리가 많이 굽으신 할머니들이 할아버지의 큰 소리에 허리도 제대로 펴지도 못하며. 내가 사는 집 앞은 어르신들이 커다란 비를 질질 끌고, 할머니들이 허리를 펴고 지나는 길이다. 학교로 가는 아이들이 담배꽁초를 밟지 않고 가는 길이기도 하다. 그 길에 열기를 조금이라도 식혀줄 풀을 심기로 했다. 그렇게 하면 더 담배꽁초를 버리지도, 쓰레기를 버리지도 않을 것 같아서이다. 비가 그친 후 제법 촘촘하게 국화를 꽂고, 아침저녁 나절로 물을 준다. 제법 싹이 눈에 띄었다. 그리고 그사이 담배꽁초가 장식으로 놓였다. 행인들이 손을 더한다. 잠시 실외기가 가동을 멈추는 사이 창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옆집의 대화 소리가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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