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심 고을 충주(中心州 忠州)
중심 고을 충주(中心州 忠州)
  • 조준형 충주전통문화회 고문
  • 승인 2020.06.14 1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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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광장
조준형 충주전통문화회 고문
조준형 충주전통문화회 고문

 

조준형 충주전통문화회 고문

충주는 역사의 고장이요, 중원문화권의 중심에 위치해 있어 중앙탑(신라 원성왕 대에 건립, 국보 제6호)의 위용을 드러내 자랑거리로 우뚝 서 있다.

조선 초기의 큰 학자 김종직은 충주를 칭한 시에서 `진한 땅 천 년 세월 여기는 국원성 경영루 높은 누각 긴 방을 울며 우뚝하도다. 충주는 예부터 경치 좋고 물맛 좋고 인심 좋은 삼례지향이다'라고 했다. 왜 그랬을까?

충주는 남한강을 따라 서울을 왕래하는 배가 300여 척으로, 올라갈 때는 양식을 내려올 때는 소금과 생활물품을 실어 날랐고, 156년에 최초로 뚫린 하늘재가 있어 한양길이 가까웠다.

산은 선천팔괘(先天八卦)와 삼재(三才)를 뜻한다는 천등(天登)·지등(地登)·인등(人登)산이 있고, 농기구와 무기를 만들 수 있는 철의 고장이었기에 삼국이 탐을 냈다.

실제로 삼국의 충주를 향한 마음은 역사를 통해 여실히 드러난다.

350년(근초고왕) 백제의 땅이 되고, 475년(장수왕)에는 고구려 땅이 되면서 고구려비를 세우고(국보 제205호) 국원성(國原城)이라 불렸으며, 557년(진흥왕)에는 신라땅이 되면서 국원소경(國原小京)이, 685년(신문왕)에 중원경, 757년(경덕왕)에 중원경(中原京)이라 이름 붙여졌다.

충주의 도움(유긍달)을 받아 고려를 건국한 태조 왕건은 940년에 충성스러운 고을이라 해서 충성 충(忠) 자와 청주의 청(淸) 자를 앞에 넣어 충주가 충청도 도청 소재지가 되고(1395, 태조4년), 교육기관인 향교가 평양 다음으로 들어와(1398) 전국의 330개 고을에서 진사·생원시에 합격한 인사가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 충청도를 청풍명월(淸風明月)의 고장이라 했다.

영조 때(1759, 영조 35)는 서울 인구가 17만2000, 충주는 10만7000으로 2번째 큰 도시였다면, 1895년(고종32) 전국을 23부로 나눌 때 충주부(忠州府)로 20개 군을 관찰하는 관찰 소재지였고, 1895년~1908년까지는 충청북도 도청소재지였다.

역사적으로 볼 때 우리 충주의 지명은 중앙 또는 중심을 뜻하는 지명이 10여 차례 나온다. 중심이란 중용에서 `치우치지도 않고 모자라지도 않는 변함이 없음'을 말한다. 광주(光州)는 `빛고을 광주'라 하고, 해남(海南)은 `가두리'라는 지명을 `땅끝마을'로 바꿔 관광브랜드화 해 수백만 명이 방문한다.

우리 충주의 `중심고을 충주'는 곧 이 땅의 역사이며, 대한민국의 중심이고, 세상의 중심으로 살아가는 후손을 위한 보물 같은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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