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주의 작곡가 황길성
청주의 작곡가 황길성
  • 정인영 사진가
  • 승인 2020.06.11 18: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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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정인영 사진가
정인영 사진가

 

“내 인생의 소중한 인연으로 만난 작곡을 할 때의 최우선은 사람들에게 영원히 사랑받는 노래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작곡가 황길성. 6·25 전쟁이 남북 간의 휴전으로 그친 2년 후 충청북도 청주에서 태어난 그는 부모님의 온화한 성품 아래 별 어려움 없이 어린 시절을 보냈다.

아버지의 권유로 서울에 올라간 그는 화가의 꿈을 키워가며 그림공부를 했다. 그림작업을 착실하게 하면서 시간을 쪼개어 극장 쇼를 구경하러 다니면서 차츰 가수들의 노래에 호기심을 느껴가던 그는 가수에 대한 관심이 커졌다.

가수로의 새로운 길을 생각할 무렵 집에서 충격적인 소식이 들려왔다. 공무원인 아버지가 친구의 사기성 짙은 꼬임에 넘어가 가정이 파탄 날 지경이란 것이어었다. 집에 와보니 그로서도 뾰족한 수가 날 수도 없었겠지만, 무엇보다도 아버지 어머니에게 자그마한 위안도 되지 못한 그는 다시 서울행 열차에 몸을 실었다.

당시 극장에서는 아도로크쇼라 불리는 가수들의 공연이 영화와 영화상영의 중간에 있었다. 어려서부터 노래를 곧잘 부르던 그는 청중들의 환호에 둘러싸인 가수들을 부러워하면서 마음을 달랬다.

극장에 쇼가 있을 때마다 나타나는 그를 쇼단 측은 눈여겨 보았고, 꿈에도 그리던 쇼 무대에 출연할 기회를 얻었다.

물 만난 고기 같은 기분이었다. 인기가수 이미자와 그의 딸 정재은과 함께 자신의 노래솜씨를 한껏 내보였다. 그는 극장쇼에서 더 나아가 밤업소에도 출연했다. 가요계의 저명인사들을 만나게 되는 행운이 찾아왔다. `오 내사랑'을 부른 가수 민희라의 신랑 김일홍 매니저를 만났고, 그 후 작곡가 김수환과 김동찬을 만나 교류하면서 가수와 작곡 등을 겸하면서 역량을 발휘했다. 훌륭한 작곡가 겸 가수로의 발전을 위해서라면 그 무엇도 거칠 것이 없었다.

1970년대 중반 KBS 신인가수 등용문 프로에서 우수상을 받은 그날 사회자 곽규석이 경연에 나선 12명 중 가장 잘했다고 극찬한 것을 지금도 잊지 못하고 있다. 그는 이즈음 미모의 여성을 만나 백년가약을 맺었다.

그의 가수실력은 절정에 올라 밤무대에서 `추억의 용두산'을 부를 때마다 뭇 여성들의 부러움과 연정의 박수를 받기도 했다. 88올림픽 개최로 세계 여러 나라와 어깨를 나란히 하던 시기에 그는 가수의 길을 접고 작곡활동만 했다.

작곡에만 몰두하던 그는 맘모스기획 손오현 사장의 안내로 청주에 내려왔다가 다시 강원도 춘천으로 가 업소에 출연하는 등 세상을 떠돌아다니면서 방황의 언저리를 맴돌기도 했다.

하지만, 천성이 올바른 그는 얼마 안 가서 탤런트들과 연극배우들을 가르치면서 본연의 작곡에만 역량을 기울여왔다.

그는 작곡사무실이나 밖 어디를 가더라도 바람직한 악상이 떠오르면 머릿속에 잘 기억해 두었다가 집에 돌아오는 즉시 곡을 만든다. 곡을 만드는데 소홀함은 있을 수 없다고 말한다. 피아노연주에 상당한 실력을 지닌 그는 `작곡가로서 스스로 노력하여 자수성가'하는 것이다.

가수 오은주의 `기다림'과 `오해는 하지 마세요.'와 김상진의 `믿은 내가 미워요.'를 작곡한 그는 이혜진의 `난계연가' 등 많은 작품을 만들어 놓고 있다.

그는 지금 작곡인생 50년을 맞아 전국에서 신인가수를 모집하고, 아울러 그들의 성장을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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