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의 등
어머니의 등
  • 이은일 수필가
  • 승인 2020.06.09 1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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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이은일 수필가
이은일 수필가

 

엊그제 시어머니가 오셨다. 꼼짝할 수 없게 아프다기에 집으로 모시고 와 한의원에 가서 침도 맞고 물리치료를 받았다. 대추나무 밑 밭의 풀을 뽑다가 등허리에 무리가 간 모양이다. 다행히 근육이 조금 늘어난 거라서 열흘 정도 통원 치료받으면 된다는 말에 일단 마음이 놓였다.
다음 날, 목욕하고 싶다셨다. 욕조는 들고나기가 불편할 것 같아 샤워부스에 의자를 놓고 씻기로 했다. 얼굴만 까맣게 그을린 어머니 모습이 개구쟁이 아이 같다. 물 온도를 적당히 맞춰 머리부터 감겨 드렸다. 어머니의 하얀 머리카락은 명품 중의 명품이다. 숱도 많고 전체가 깨끗하게 흰색이라 정말 우아하고 멋있다. 나도 나중에 이런 은발이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목 뒤부터 아래쪽으로 때를 밀기 시작했다. 지우개 똥처럼 때가 떨어져 나온다. 평소 깔끔한 성격이라 전에도 가끔 등을 밀어 드리곤 했지만, 때가 나왔던 적은 거의 없었다. 요즘 통 씻지 못하셨나 보다. 휘어지고 굽은 등을 미는데 울퉁불퉁 손이 걸린다. 부모는 자식 뒷바라지에 등골 휘는 줄 모른다더니 칠 남매 키워낸 삶의 무게가 고스란히 척추 마디에 걸려 있는 듯해 마음이 짠했다. 훅 올라온 더운 김에 쓸쓸함이 서려 눈앞이 뿌옇다.
문득 최민자 수필가의 ‘외로움이 사는 곳’이 떠올랐다. 아무리 애를 써도 만져지지 않는 견갑골 등성이 아래 후미진 골짜기에 숨어 산다는 외로움은 오직 나 아닌 타자(他者)만이 만져 줄 수 있다고 했다. 유연해서 만져지지 않는 데가 없다면 혹시 외롭지도 않은 걸까? 어머니의 외로움은 어느새 기세등등 온 등판에 자리를 잡고 있다. 등을 넘어 이미 어깨와 허리까지 침범했는지도 모른다. 나는 때를 밀어주는 것이 마치 어머니의 외로움을 몰아내 주는 일이라도 되는 양 천천히 꼼꼼하게 때를 밀었다. 그런 다음 비누칠로 몽글몽글 몸을 덮은 우울의 거품도 샤워기로 깨끗이 씻어냈다.
“아, 이제 개운하다!”
어머니 말이 곧 내 마음이었다.
둘러보면 어머니처럼 시골에서 혼자 사는 노인이 꽤 많다. 몸 움직일 수 있고 텃밭 가꾸고 채소라도 자식들에게 줄 수 있어 마음이 편한 이 땅의 부모들이다. 하지만 몸이 아플 때가 문제다. 평균 수명이 높아진 만큼 소득 지원이나 건강 관련 사업, 돌봄서비스 등 노인을 위한 여러 가지 제도들도 많이 생겨났지만, 여전히 해결되지 못한 채 남겨진 문제들은 고령화 시대를 사는 우리가 더 고민해야 할 숙제이다.
2년 전 한때 비타민D 수치가 극도로 낮았던 적이 있었다. 비타민D가 부족하면 치매에 걸릴 가능성이 있다고 해서 한동안 일부러 팔다리를 내놓고 햇볕 쬐기도 했다. 그때 TV에 나온 네덜란드의 호그백(Hogeweyk) 마을에 대해 유심히 보았던 기억이 난다. 마을 형 요양 시설이었는데, 곳곳에 설치된 CCTV와 수많은 훈련된 직원이 마을 주민으로 상주하며 필요한 모든 지원을 해주는 가운데 치매 노인들이 자유롭게 생활하고 있었다. 기존의 의료적 접근이 아닌 사회적 접근으로 치매 문제를 풀어간 것이 무척 흥미롭고 인상적이었다.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노년을 아름답고 행복하게 마무리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인생살이에 정답은 없는 거지만, 스스로 심신의 건강을 관리하는 일만은 꼭 필요할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사회적 거리 두기 때문에 중단했던 요가를 다시 시작해볼 생각이다. 외로움에 은신처를 내주지 않으려면 열심히 운동하는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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