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우연과 필연의 사이에서
6월, 우연과 필연의 사이에서
  • 정규호 문화기획자·칼럼니스트
  • 승인 2020.06.09 1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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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단상
정규호 문화기획자·칼럼니스트
정규호 문화기획자·칼럼니스트

 

'착한 임대료는 어디로 가는가.'
길거리에 나붙었던 ‘착한 임대료’에 대한 현수막이 슬그머니 사라졌다. 코로나19로 인해 살길이 아득한 임대상가에 대해 임대료를 깎아주거나 납부기한을 연장해주었던 건물주의 자발적인 ‘선함’이 있었고, 칭찬으로 화답했던 사회적 분위기가 ‘생활 속 거리두기’를 타고 느슨해진 것인가. 미디어 매체마다 (주택이든 상가든)임대료 오름세가 심상치 않다는 보도가 잦아지면서, 고스란히 예전으로 돌아가고 있는 건 아닌지 궁금하다.
재난의 위기에서 발휘된 일부 건물주들의 임대료 감면 행동은 자발적 선량함이다. 부자가 가난한 이들의 처지를 살펴본다는 인품에서 비롯된 일인데, 이런 일은 절대로 필연이 아니다. 건물주의 인품과 어려운 사회·경제적 환경을 극복하기 위한 우연의 공감대에 해당한다.
옛 동지들과 모처럼 모여 가볍게 한 잔 한 뒤 귀가하는 시내버스에서 느닷없이 사람 사는 세상의 우연과 필연의 사이에 대한 생각이 깊어졌다. 결국 서문에 짧게 쓴 한 문장, ‘우연에 기댈 때도 있었다’를 그대로 제목으로 쓴 황동규의 시집을 책꽂이에서 꺼낸 것은 나에게 우연인가, 필연인가. 
선량한 인품이 바탕이 되겠으나, 조물주보다 위에 있다는 건물주와 토지 불패 신화의 자본주의 세상에서 임대료 감면이라는 은혜는 ‘착한’ 우연이다. 그 반대편에 있는 필연은 임대료를 제때, 그리고 좀 더 많이 받으려고 눈에 불을 켜는 욕망일 것이다. 우리 사회는 여태 누군가의 특별한 우연을 통해 위기를 극복하는 과정을 그저 귀감으로 여길 뿐, 이를 제도화하는 진화로 동력을 확산하지 못한다. 임대료를 깎아주는 우연의 선의는 심적이든 물적이든 그만한 여력이 존재한다는 필연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맘 같아서는 그 실태를 파악해 표창을 하거나 향후 임대료 산정의 지표로 삼을 수도 있겠다 싶은데, 선의를 왜곡할 수 있다는 핑계만 가득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주 평범한 사람들의 자발적 선의가 모여 세상을 바꾸는 거대한 힘이 되고 있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으나, 또 제대로 기억하지 못한다.
33년 전 오늘, 유월 항쟁 때도 그랬다. 유별나게 ‘지방 과격 시위’로 부각시켰던 중앙 일간지의 호도에도 불구하고, 대통령 직선제 개헌과 제반 민주화 조치 시행을 약속하는 항복의 ‘6.29 선언’은 오롯이 전국 각지에서 거리로 뛰쳐나온 100만이 넘는 시민의 힘이었다.
그 때 ‘필연’으로 여겼던 정치권과 사회지도층의 세계는 여전히 지배적이고 우월적이지만, 뜨거운 아스팔트 위에서 분투하던 보통의 시민들은 뚜렷한 기대이거나 작심한 의도 대신 ‘우연’처럼 불현듯 다가와야 하는 민주주의에 대한 뜨거운 사랑이었다.  
그런 보통 사람들의 뜨거운 ‘우연’은 원래 보이지 않았던 것인 양 제자리로 스며들었고, ‘필연’을 가장한 무리들이 ‘내림 줄 쳐진 시간’을 함부로 재단하지는 않는지 조용히 지켜보고 있다. 
‘저물 녘, 마음속 흐르던 강물들 서로 얽혀/ 온 길 갈 길 잃고 헤맬 때/ 어떤 강물은 가슴 답답해 둔치에 기어올랐다가/ 할 수 없이 흘러내린다/ 그 흘러내린 자리를/ 마음 사라진 자리로 삼고 싶다 <황동규, 「쨍한 사랑노래」. 부분>
칭송과 감사가 간절하게 담겨 있던 ‘착한 임대료’는 치워지고, ‘거리두기’보다 ‘생활’에 강조의 무게가 실리는 방심으로 코로나19는 끊어질 듯 이어지면서 아직 끝을 보이지 않고 있다. 더운 마스크를 고쳐 쓰며 눈치를 살피면서 보통의 ‘착함’이 더 잘 기억되고 제도화됨으로써 더 나은 곳으로 향하는 사회적 진화를 생각한다. 
거기, 6월 항쟁 표지석을 보며 상념에 빠져 있는 사이, 근처에 있던 공중화장실이 사라졌다는 걸 뒤늦게 알았다. 어떤 민선시장의 어머니에 대한 효심이 강조됐던 화장실 대신 작은 쉼터가 언제 새로 만들어졌나. 이제 급한 일은 각자 해결하고 도심의 차분한 ‘쉬어 감’을 권할 만큼 우리는 차분해지고 있는가.
‘저어새 하나 엷은 석양 물에 두 발목 담그고/ 무연히 서 있다/ 흘러온 반대편이 그래도 가야할 곳, <황동규,「더 쨍한 사랑노래」. 부분>
더 깊은 곳으로 돌아가는 길을 찾아야 하는 코로나19의 6월.
세상은 코로나19 이전과 이후, 우연과 필연의 사이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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