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지를 자르려는 당신에게
가지를 자르려는 당신에게
  • 배경은 단재기념사업회 사무국장
  • 승인 2020.06.07 1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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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가는대로 붓 가는대로
배경은 단재기념사업회 사무국장
배경은 단재기념사업회 사무국장

 

어릴 적 한 번도 효녀였던 적이 없던 내 별명은 `배청이'였다. `효녀 심청이'를 빗대어 부르는 말이다. 아빠는 자주 나를 그렇게 불렀다. `너도 나이 들어 자식 낳으면 내가 하는 말이 뭔지 알 거다.'라는 모르는 말씀을 하시곤 했다. 그러나 정말로 내가 엄마 노릇 20여 년 만에 그 말씀을 깨닫는다. 그냥 곁에 살아 있어 주는 것만으로 효를 다하는 거라는 말씀이신 것이리라, 그것으로 충분한 부모의 마음일 것이다.

얼마 전, 가슴 뭉클한 그림책을 알게 되었다. 지금은 절판된 장정인 작가가 쓰고 그린 `가지를 자르는 나무'다. 첫 데뷔작이라고 한다. 어릴 적, 남 앞에서 노래 부르는 걸 자신 없어 했는데 이런 상처가 덧나면 무엇인가를 시작하기도 전에 포기하고 싶은 두려움이 생긴다며 그림책 마지막 장에 자신의 경험을 말한다. 그러나 자라면서 단짝 친구를 만나 상처를 극복하게 되었다는 이야기와 그래서 상처에 지지 않고 자라기를 바란다는 말도 덧붙인다.

어느 사과 과수원에 밤이 되면 어디선가 뚝, 툭 소리가 난다. 유난히 작은 나무 하나가 꽃이 핀 가지를 스스로 자르고 있다. 며칠이 지난 어느 날, 새 한 마리가 사과꽃 향기를 따라 과수원에 날아든다. 새는 노래를 부르며 과수원을 돌아다니다가 가지가 몇 개 없는 작은 나무를 보았다. 그날 밤에도 작은 나무는 자신의 가지를 잘라내고 있었다. 새가 깜짝 놀라 이유를 물어도 나무는 말없이 가지를 잘라냈다. 다음 날, 새는 작은 나무 위에 둥지를 틀었다. 나무에게 노래를 불러주고 하늘을 날며 보았던 신기한 세상 이야기를 들려준다. 새와 나무는 오랜 시간 함께 했고 그렇게 둘은 친구가 된다. 새가 나무에게 다시 물었다. 왜 밤마다 스스로 가지를 자르냐고. 그것은 과수원 주인이 자기는 작고 약해서 사과를 맺을 수 없을 거라고 물도 충분히 주지 않고, 잘 돌봐 주지 않아서 스스로 가지를 잘라 버리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야기를 듣던 새는 왈칵 눈물을 쏟았다. 여름이 되고 사과 꽃이 떨어진 자리에는 작은 열매들이 맺히고 새도 둥지에 알을 낳는다. 작은 나무는 몇 개 안 남은 가지로 비바람을 막아 둥지를 지켜준다. 그렇게 지난 어느 날, 하늘이 유난히 파란 아침, 새는 잠자는 나무를 깨워 기쁜 소식을 알린다. 둥지를 보호해 주기 위해 떼 내지 않았던 가지에 사과가 열린 것이다. 자기도 열매를 맺을 수 있게 된 나무는 새와 함께 행복했다.

스스로 가지를 잘라내는 나무라니 상상만으로도 마음이 아프다. 주인의 말 한마디가 작은 나무의 생을 바꿔놓은 것이다. 생각해보면 나도 아빠의 조건 없는 사랑의 말이 열등감 없는 어른으로 자라게 해주었는지도 모른다. 주인의 관점에서는 작은 나무는 가성비가 떨어지겠으나 자연의 섭리에서 보면 귀한 생명이고 열매를 맺어야 하는 사명이 있다. 나무는 결국 자기 몫의 일이 무엇인지 알아낸다. 좋은 멘토 같은 친구를 만났기 때문이다.

한 마디쯤이야, 한 번쯤이야 하는 무성의가 상대방에게는 치명적인 영혼 살해 도구가 될 수도 있다. 전우익 선생은 삶이란 무엇에게, 누군가에게 정성을 들이는 것이라고 했다. 정성을 들인다는 것은 시간이라는 더께가 쌓여 자기도 모르는 사이, 좋은 열매를 맺게 되어 따뜻한 변화를 함께 경험하는 것이 아닐까. 상처 많은 나무에 새가 찾아왔듯이 우리 주변에는 기적과 같은 인연이 얼마나 많은지 다시 생각해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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