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병장 -日헌병 기념비 한곳에… 전국서 유일
의병장 -日헌병 기념비 한곳에… 전국서 유일
  • 연지민 기자
  • 승인 2020.06.04 1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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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 제65회 현충일
충북 진천군 문백면 옥성리에 일본 조선총독부가 세운 '일본헌병 순직비'와 군민들이 세운 '의병장 한봉수항일의거비'(위)가 세워져 있다.
충북 진천군 문백면 옥성리에 일본 조선총독부가 세운 '일본헌병 순직비'와 군민들이 세운 '의병장 한봉수항일의거비'(위)가 세워져 있다.

 

6일은 제65회 현충일이다. 나라를 위해 목숨 바친 순국선열과 호국영령들을 추모하기 위해 지정된 이날은 전국의 현충시설에서 추모식이 열린다. 기념물이 건립된 장소는 신성한 의미가 부여되고 상징성이 강화된다.

전국에는 총 4384개소의 현충시설이 있지만, 충북 진천군에만 유일하게 일본통감부가 세운 `일본헌병 순직비'와 군민들이 세운 `의병장 한봉수항일의거비'가 같은 장소에 세워져 지난 역사를 증명하고 있다.

이처럼 침략과 항일의 사건을 두고 일본과 한국의 기념비가 같은 장소에 남아있는 것은 전국의 시설물 중 유일무이한 사례로 근대문화재로 지정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박걸순 충북대학교 교수는 “일제강점기 당시 일본통감부가 세운 `일본헌병 상등병 시마자키 순국비'는 우리나라 독립운동사에서 희소성과 역사성을 갖는다”며 “1908년 일본헌병이 한봉수 의병장에게 사살된 곳에 순직비를 세웠다는 점, 일본 헌병의 이름이 정확하게 명시되어 있다는 점 등으로 볼 때 근대문화재로 지정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일제강점기 시절 강대국으로의 힘과 침략의 역사를 증명하기 위해 일본은 한반도에 많은 기념물을 세웠다. 하지만 현대화와 일제잔재 청산이란 이유로 파괴되면서 잔인했던 일본의 역사도 잊히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일본이 식민지배 이데올로기를 극대화하기 위해 건립한 각종 공공기념물이 우리의 시야에서 사라지면서 지난한 역사를 증명할 일제잔재를 상징적으로 보여줄 필요가 있다는 견해다.

박 교수는 “일본군 순직비와 항일의거비가 한 장소에 세워져 지금까지 남아있는 것은 전국에서도 유일한 사례이다”면서 “언덕 정상부에 일본통감부가 세운 이 순직비를 해방 후 문백 군민들이 끌어내리고 나서 한봉수의병장의 항일의거비를 세웠고, 그 밑에 일본 순직비를 둠으로써 역사를 기억하는 장소로 삼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해방이 된 후 주민들은 분풀이로 이 비석에 도끼질을 했다. 지금도 비석에 도끼 흔적이 남아있다. 돌이 좋아 깨지지 않았는데 새마을 운동을 하면서 비석을 재활용하기도 했다”면서 “근대문화재로 지정해 후손들이 우리나라의 독립운동을 기억하는 역사적 장소로 남겨야 한다”고 밝혔다.



◇`일본헌병 상등병 시마자키 순직비'와 `의병장 청주 한봉수 항일의거비'

청주와 진천 간 17번 국도변 바위배기에는 `일본헌병 상등병 시마자키 순직비'와 `의병장 청주 한봉수 항일의거비'가층위를 달리해 나란히 서 있다.

야트막한 야산이었던 이곳은 도로가 생기면서 잘려나갔지만 1908년 6월 10일 한봉수 의병장이 일본 헌병기마대의 호위 아래 우편 행랑이 진천으로 향하는 것을 습격해 현금을 빼앗고 일본헌병 시마자키를 사살한 장소다.

일본통감부는 당시 전투 현장인 이곳에 `고육군헌병상등병시마자키순직비'를 세웠다.

해방 후 1977년 문백 면민들은 그 비를 끌어내리고 성금을 모아 의병장을 기리는 `의병장 청주한공봉수 항일의거비'를 그 자리에 세웠다. 한봉수 의병장과 그가 사살한 일본군의 비를 아래에 배치함으로써 국내에서는 독립운동사에서 유일한 역사의 현장으로 주목받고 있다.

/연지민기자
annay2@cctime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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