빵긋빵긋 웃는 빵이 좋다
빵긋빵긋 웃는 빵이 좋다
  • 장홍훈 양업고 교장·신부
  • 승인 2020.06.04 1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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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은자의 목소리
장홍훈 양업고 교장·신부
장홍훈 양업고 교장·신부

 

뻐-꾹, 뻐꾹새 우는 뜨거운 태양 아래 딸기, 토마토, 당근, 깻잎, 상추만이 살쪄가는 시절이 아니다. 그 옆에 하루가 무섭게 번지는 잡초도 있다. 아직 시원한 조석을 놔두고 한낮에 텃밭에 나와서는 이 무슨 땀범벅인가? 그러나 이런 자책을 무마해버리고도 남는 이치도 있기에 도리어 기분 좋아지는 풀 뽑기이다. `빵'을 얻기 위해선 땀을 흘려야 한다는 쉬운 이치이다.

빈손으로 세상에 와서는 재물, 권력, 출세, 학문 등 온갖 욕심을 부리다가 결국은 그 무엇도 가져갈 수 없는 인생이라지만 그래도 엄연한 사실 하나는 있다. 오늘의 양식이 절대 필요하다는 현실이다. 그 누구에게나 빵이 필요하다.

`빵'은 히브리어로 `레헴'이라고 하는데, `부서지다, 사라지다.'라는 무시무시한 뜻을 지니고 있다. 빵이 생명의 양식이 될 수 있는 게 역설적으로 `또 다른 주검이 주는 열매'이라서 이다. 빵을 먹으면서 히브리인들은 고통의 냄새, 죽음의 맛도 새긴다고 한다. 한 알의 밀알이 부서져 싹을 틔우고, 열매가 되자마자 또 산산이 으깨져야, 뜨겁게 구워져야, 빵이 생겨나기 때문이다. 눈물과 땀과 피가 섞인 빵 맛이야말로 진정한 인생의 맛과도 같아진다는 뜻이다.

까뮈의 대표작 `페스트'의 한 장면이다. 어둠과 악을 상징하는 페스트가 한 마을을 엄습한다. 무신론자인 의사와 예수회 신부 앞에서 한 젖먹이가 몸을 뒤틀며 죽어간다. 의사는 “이 젖먹이는 죄가 없다. 당신도 그걸 모를 리 없지.”라고 내뱉고는 방을 나간다. 이는 흡사 `만약 하느님이 있으시다면, 그 하느님이란 얼마나 무자비한가'라고 쏘아붙이는 투다. 신부는 그래도 강론을 이어 간다. “지금 아이의 고통은 우리에게 있어 쓰디쓴 빵이다. 하지만 이 쓴 빵이 없이 우리 영혼은 굶주려서 더욱 비참해질 것이다.”라고 말한다. 이는 일찍이 괴테도 비슷했다. “하늘의 힘을 모르고 말 것이니, 눈물을 흘리며 빵을 먹어본 적이 없는 사람이여….”

점심때 빵이 나왔다. 함께 식탁에 앉은 학생의 이름이 다영이다. 그 옆에서 다영이의 절친이 이름을 가지고 놀린다. “얘는 보나 마나 다 빵점이에요. 다영이잖아요” 나는 아직 텃밭에 한창 자라나는 시절 같은 그들을 보고 물었다. “그래, 빵 맛이 어떠냐?” “예, 달콤하고 부드럽고 맛있어요”. 대화 중 이런 생각이 스친다.`얘들이 빵 맛을 아는 걸까? 밀알 하나가 땅에 죽어 물과 햇빛을 제대로 받아 열매를 맺으며 그 열매가 바수어져 가루가 되고, 그 반죽이 뜨거운 불을 견뎌야, 마침내 달콤하고 고소하며 부드러운 생명의 빵이 된다는 것을…”

양업고에는 특성화 과목으로 `노작(作)'의 시간이 있다. 700평 되는 밭에 나가 농사를 짓는다. 올해는 등교가 늦어져 선생님들이 미리 학생들이 원하는 작물들을 신청받아 심어놓았다. 인터넷 수업을 하다가 등교한 고 3학년들이 첫 노작을 마치고는 이구동성이다. “너무 땀이 나요, 그런데 재밌어요. 신기하게 고추와 오이가 열렸어요.”

무엇이 아이들에게 빵의 맛을 알 수 있는 교육일까? 태양 아래 땀을 흘려 보는 것, 그 결과로 열매를 수확하는 기쁨을 맛보는 것이야말로 `빵 교육'이자 `생명 교육'일 터다. 참으로 간절한 바람이 있다.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에 우리 아이들이 꼭 필요한 `빵'이 되었으면 좋겠다. 왜냐면 사람이 또한 빵으로만 사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마태 4,4) 그래서 얼토당토않은 아재 개그가 하나가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을 어찌 막으랴! 우리 아이들이 이 세상이라는, 이 사회라는 밭에서 늘 빵긋빵긋 웃는 `빵'의, 웃음 전도사가 되었으면 좋겠노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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