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사과는 하지맙시다
이런 사과는 하지맙시다
  • 권혁두 기자
  • 승인 2020.05.31 19:1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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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논단
권혁두 국장
권혁두 국장

 

“어려운 시기에 저희까지 심려를 끼쳐드려 송구합니다.”

부천의 한 물류센터에서 코로나 집단감염 사태를 초래한 쿠팡이 그제 홈페이지에 낸 사과문의 서두이다.

여기서 `저희까지'라는 문구가 영 거슬렸다. `심려를 끼쳐 송구합니다' 하면 될 터인데, 굳이 `저희까지'를 추가한 저의가 궁금했다. 자기들 말고도 코로나로 민폐를 끼친 집단이 적지않았다는 점을 시사하려는 의도로 읽혀졌다.

“그동안 종교시설, 콜센터, 클럽, 노래방 등이 집단감염의 진원지가 됐었는데, 우리도 그 중의 한 곳일 뿐이다”는 물타기 작전을 시도한 정황이 그 문구에서 엿보였다.

이어진 사과문 내용은 이같은 해석에 확신을 갖게 한다.

쿠팡이 사과할 것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직원들이 밀집 상태에서 분주히 오가며 일해야 하는 취약한 작업환경에도 불구하고 방역체계가 허술했다는 점이다. 일용직 근로자들은 방한복과 신발 등을 돌려가며 썼다고 한다.

다른 하나는 확진자 발생 후에도 물류센터를 즉시 폐쇄하지않고 가동했다는 점이다. 지난달 24일 오전 확진자 발생 사실을 통고받고도 오후 근무자들을 출근시켰다. 이 들 중에서 확진자 1명이 추가로 나왔다.

그러나 쿠팡은 이에 대한 사과를 “열감지 카메라를 설치하고 일일 방역을 했다. 마스크와 장갑 등을 비치하고 직원들이 마스크와 장갑을 쓰고 작업하도록 적극 권했다”는 두마디 변명으로 대신했다.

그리고는 택배를 통해 바이러스가 전파된 사례가 전세계에 보고된 적이 없다거나 이미 배달된 상품의 오염 가능성은 없으니 소비자들은 안심하시라는 영업성 멘트만 줄줄이 이어졌다.

압권은 말미를 장식한, 비판자에 대한 야유로도 들리는 자찬이었다. “`쿠팡 덕분에 코로나 견딘다. 힘내라'고 격려해 주시는 분들이 계십니다.”

“5분 정도의 짧은 면담 과정에서 불필요한 신체 접촉을 했다. 행위의 경중에 관계없이 잘 못된 처신이었다.”

직원 성추행으로 사퇴한 오거돈 전 부산시장은 이렇게 사과했다가 되레 피해자와 여성단체의 분노를 샀다.

`5분의 면담'과 `경중에 관계없이'는 듣는 이들이 사안을 가볍게 보도록 유도하는 교묘한 장치로 동원됐다.

“상대가 성적 수치심을 느낄 불필요한 신체 접촉을 했다. 잘 못 했다”고 하면 될 것을 잔머리를 굴려 사족을 달았다가 더 구차해진 케이스 였다.

사과는 간절해야 한다. 사과 받을 당사자들의 공감을 얻겠다는 단 하나의 목적을 위해서 말이다. 1970년 폴란드를 방문한 빌리 브란트 독일(서독) 수상이 바르샤바의 나치 희생자 위령탑 앞에서 무릎을 꿇은 장면은 사과하는 방식의 전범으로 꼽힌다. 당시 독일 내부에서는 수상의 저자세가 지나쳤다는 비판도 제기됐다. 이 비판대로 브란트의 사과는 지나칠 정도로 간절했기에 세계의 공감을 얻고 독일의 품격을 높였다.

21대 국회의원이기도 한 윤미향 정의기억연대 전 이사장이 그제 기자회견을 열고 “국민에게 깊은 상처와 심려를 끼친 점에 대해 사죄한다”고 했다. 그러나 제기된 의혹 대부분은 부인했고, 사퇴를 바라는 여론에는 “의원 직을 성실히 수행하겠다”는 말로 맞섰다. 야박한 평가일지 모르겠지만, 그가 시인한 과실은 사실관계가 워낙 명백하게 드러나 변명의 여지가 없는 두 건에 불과했다. 개인계좌로 성금을 모은 점과 위안부 피해자들을 위해 조성한 쉼터 관리인으로 아버지를 고용한 점이었다. 나머지 의혹들은 절차에 부정이 없었다거나 사실이 아니라며 부인했지만 증빙할 문서나 자료는 제시하지 않았다.

국민이 모욕을 당하는 일이 비일비재 하지만 국민이 위안을 받을 사과다운 사과는 좀처럼 들리지 않는다. 사과하는 것은 곧 패배하는 것이라는 옹졸한 아집에들 매여있는 것은 아닐까. 누구도 무릎끓은 브란트를 패자로 부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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