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팔균과 이월초등학교
신팔균과 이월초등학교
  • 공진희 기자
  • 승인 2020.05.27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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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의 주장
공진희 부장(진천주재)
공진희 부장(진천주재)

 

진천 이월초등학교에 동천(東川) 신팔균 기념비가 있다.

동천 신팔균(申八均)(1882~1924)은 지청천(池靑天)·김경천(擎天)과 함께 남만주 3천으로 불린 독립운동가이다.

전통적인 무반 가문의 후예로 태어나 1900년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 제2기생으로 입학해 재학 중인 1902년 7월 6일 육군 참위로 임관하였으며 구한말 궁궐 시위대와 근위대의 요직에서 근무했다.

판중추부사 신헌(申櫶)의 손자이며 한성부판윤 신석희(申奭熙)의 장남이다.

1908년 11월 그의 동생 신필균(申必均)은 일가인 신재균과 함께 1897년 신욱이 고향인 진천군 이월면 노곡리에 세운 학교를 인수하여 보명학교(普明學校)(지금의 이월초등학교)로 개칭한 뒤 문중적 기반으로 운영하고 있었다.

군대해산 뒤 낙향한 신팔균은 이 학교 운영에 참여하여 국어·역사·지리·한문 등을 가르치며 학생들에게 민족사상을 고취시켰다.

1919년 4월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의 교관이 되어 지청천(池靑天)·김경천(擎天)과 함께 교관으로서 군사훈련을 담당했다.

1919년 5월 독립전쟁 지도자 양성소인 신흥무관학교의 교관으로 이범석(李範奭)·김경천 등과 함께 2000여 명의 독립군을 양성해 청산리대첩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맡았으며 일부는 한인사회에 설립된 각 지역 민족학교의 교원이 되어 애국청년들을 양성했다.

1922년 8월에 남만주 일대에서 의군부·광복단 등 8개 독립군 단체가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로 통합·결성되어 만주 지역 친일 주구배를 처단하는 등 무장투쟁을 전개하였으나 이념의 갈등과 의용군의 분립, 그리고 상호 무력충돌과 재정난 등으로 매우 어려움을 겪었다.

이에 통의부는 1924년 1월 8일 개최된 중앙위원회에서 위원장제도로 개편하고 북경에서 활동하고 있는 그를 군사위원장으로 추대했다.

그해 6월 21일에는 의용군사령관을 겸직함으로써 그는 대한통의부의 가장 중요한 군사 활동의 총책을 맡게 된다.

1924년 7월 2일 중국 지방군의 습격을 받아 항전하는 과정에서 전사·순국했다.

동천의 항일투쟁에서 주목해야 할 부분은 그의 아내이자 평생동지였던 임수명 여사의 활약상이다.

임수명(任壽命)(1894~1924)은 1912년 서울의 한 병원에서 간호원으로 근무했다. 이때 일본 경찰에 쫓겨 환자로 위장 입원했던 신팔균을 알게 되어 2년 후 그와 결혼하였다. 그 후 북경으로 망명한 남편의 비밀문서 전달 및 연락 등을 맡아 활동했다.

1921년 밀명을 띠고 입국한 남편을 따라 만주 등지에서 독립운동을 했으며 1922년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가 결성되었을 때 단원으로 활약했다.

신팔균 장군의 순국소식을 듣고 갓난 딸과 함께 생을 마감했다.

정부에서는 신팔균의 업적을 기리어 1963년 국민훈장 독립장을, 부인 임수명 여사에게는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1993년에는 이월초등학교 교정에 그를 추모하는 사적비가 세워졌다.

이월초등학교가 올해로 개교 100주년을 맞는다. 4월 총선으로 연기된 기념식이 코로나 장기화로 10월에 열릴 예정이다.

이월초등학교는 신팔균이 강의했던 보명학교의 전통을 이어받고 있다.

동천은 조국의 광복을 보지 못했지만 그의 정신은 기념비에 새겨져 우리 아이들의 가슴으로 이어지고 있고 그의 추진력은 한일 무역분쟁에서 `NO JAPAN 운동'으로 빛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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