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에도 `부부의 세계'는 있었다
조선에도 `부부의 세계'는 있었다
  • 윤나영 충북도문화재연구원 문화재활용실장
  • 승인 2020.05.26 1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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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즈 포럼
윤나영 충북도문화재연구원 문화재활용실장
윤나영 충북도문화재연구원 문화재활용실장

 

안방을 뜨겁게 달궜던 드라마 `부부의 세계'가 종영했다. 불륜이란 흔하디 흔한 소재이지만, 남편과 아내 둘 사이에서만 느낄 수 있는 미묘한 감정을 스릴러처럼 흥미진진하게 그려냈다는 호평을 받았다.

이렇게 흥미진진한 부부의 세계가 어디 지금 시대만 있었을까? 인·의·예·지·신을 덕목으로 삼던 유교 국가 조선에도 분명 `부부의 세계'는 있었다. 조선 선비의 육아일기 `양아록'의 저자로 알려진 묵재 이문건은 자신의 일상을 세세히 적은 일기문을 남겼다. 그는 13세부터 74세로 작고할 때까지 평생의 이야기를 30여 책의 일기로 남겼는데, 전승과정에서 일부가 소실되고 현재는 10책만이 전해진다. 남아있는 부분은 42세부터 74세까지 총 17년 8개월간의 기록이다. 그 안에는 친우들과의 교류, 가족 간의 갈등, 자녀 교육 문제 등 일상의 이야기가 세밀하고 진솔하게 들어 있다.

그 중 부인과의 갈등도 고스란히 담겨 있다. 이문건의 부인은 안동김씨 가문 출신으로, 이름은 돈이(敦伊)이다. 그녀의 집안은 인종의 왕비인 인성왕후을 배출한 명문가로, 이문건이 상주로 유배 갔을 때 부인 집안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그녀 또한 부모님께 상당한 재산을 상속받아, 자신의 토지와 노비를 따로 둘만큼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었다. 그래서 이문건과 김씨 부인 간의 관계는 우리가 조선시대 부부관계로 연상하는 `남존여비'의 관계가 아닌, 서로 대등한 관계였다.

그런데 이문건이 바람을 폈다. 59세에 합천 해인사 모임이 있어 잠시 여행을 다녀왔다. 여행에서 돌아와 부인에게 이야기하던 중 그만 그곳에서 기생과 함께 보낸 이야기까지 해버리고 말았다. 그러자 김씨 부인은 노발대발하며 그의 이불과 베개를 밖으로 끄집어 내 불태워버렸다. 그리곤 두 끼나 밥을 먹지 않고 온종일 시샘하고 욕을 하니 부인이 밉다는 솔직한 속마음을 일기장에 고스란히 적어놓았다.

이문건과 부인과의 갈등은 이날 하루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이문건이 친하게 지내는 `종대'라는 기생이 있었는데, 그녀를 사랑한다는 소문이 퍼졌다. 그러자 이문건이 술자리에 다녀오거나 잠시 딴생각을 하는 듯하면, 부인은 기생 종대가 생각나서 그러냐고 힐책했다. 또 기녀들을 관장하는 행수기녀를 불러 이문건이 참석하는 술자리에 종대가 참석하지 않게 단속하라는 엄포를 놓기도 했다.

하지만 이문건은 매번 부인의 이야기를 가소롭게 들어 넘겼고, 결국 부인은 남편의 외도로 마음고생을 하다 자리에 눕고 말았다. 종일 밥도 먹지 못하고 앓아누운 부인에게 의원의 진료를 권했지만, 부인은 자신의 병은 병이 아니니 치료할 것도 없다고 거절했다. 그 모습을 보고야 부인의 상처가 얼마나 컸는지 깨닫고, 부인이 보는 앞에서 행수기생을 불러 다시는 기생 종대에게 술시중을 받지 않겠다고 확약을 했다고 한다.

어디서 많이 본 장면이지 않은가? 바람 피우는 남편, 화를 내는 부인, 일단락되었지만 계속 남편을 의심하는 부인, 마음의 병까지 들어버린 부인을 보고 반성하는 남편, 그야말로 `부부의 세계'의 한 장면이다.

호인이라는 평을 듣던 조선 선비님도 은밀한 부부의 세계에서는 그저 못난 남편이자, 뒤늦게야 곁에 있는 사람의 소중함을 깨닫는 부족한 인간이었다.

지금 두 사람은 괴산군 어느 산허리에 나란히 묻혀 있다. 합장묘에서는 이문건의 옷과 모자, 백자항아리, 그리고 이문건이 먼저 세상을 떠난 아내를 위해 쓴 글이 새겨진 묘지석이 함께 출토됐다. 묘비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내가 가난할지라도 부인의 내조가 이처럼 어질고, 하늘에서 부여받은 품성이 정명하니 어찌 근심하겠는가?”일기 속 모습과는 사뭇 다르다.

하지만 묘지석의 글을 보고 잠시 생각해본다. 수십 년 아옹다옹 싸우고 미워하고 질투했던 부부였지만, 마지막 그의 마음속에 남은 모습은 그저 어질고 깨끗하고 맑은 그런 모습이 아니었을까? 부부의 세계는 두 사람 말고는 누구도 알 수 없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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