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르소나와 민낯의 전형
페르소나와 민낯의 전형
  • 이영숙 시인
  • 승인 2020.05.24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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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엿보기
이영숙 시인
이영숙 시인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왜 `그리스'인을 강조하였을까? 우리가 알다시피 그리스 아테네는 민주주의의 본산이다. 인본주의의 시원이기도 한 그리스는 자유의 공간이라는 확장해석도 가능하다. 그는 동·서양 사이에 위치한 그리스의 지형적 특성과 터키 지배 아래 기독교인이라는 박해를 받으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런 경험을 토대로 민족주의 성향의 글을 썼지만, 베르그송과 니체의 사상을 접하면서 한계에 도전하는 투쟁적 인간상을 바탕으로 한 글을 썼다.

베르그송은 지식을 중시하면 할수록 영혼의 충동, 상상력, 직관력을 과소평가하여 영혼을 단순한 기계장치로 전락시킬 우려가 있다는 주장으로 과학적 분석 수단 사용을 거부한 인물이다. 그런 까닭에 그 영향을 받은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자유로운 영혼의 실존인물인 기오르고스 조르바의 삶을 소설화했는지도 모른다. 조르바의 주장은 인간을 떠올린다면 바로 자유가 튀어나와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영혼의 자유에 니체 사상의 중점인 위버맨쉬(초인)라는 옷을 입혔으니 자유롭게 살며 자유를 위협하는 이 땅의 무거운 중력들에 투쟁하는 인간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스인 조르바』는 주인공 `나'에 의해 관찰되는 `영원한 자유인, 조르바'의 삶을 다룬 장편이다. 주인공 `나'는 늘 단테의 문고판 『신곡』을 옆구리에 끼고 다니며 규범적인 말만 하는 책상물림이다. 즉 천상의 세계 지옥, 연옥, 천국이라는 카테고리에 자신을 구속하고 이 땅의 자유를 억압하며 나약한 글방 도령으로 살아가는 기독교인이다. 반면 조르바는 늘 산투르라는 음악 악기를 끼고 춤도 추고 흥도 내며 짐승에 가까울 정도로 자유로운 인생을 사는 인물이다. 두 사람은 페르소나와 민낯의 전형이다.

작가가 크레타 섬에서 가장 긍정적인 인물로 비중 높게 잡았던 피사체는 그 마을의 권력으로 자리한 수도원 사람들도 아니고 노동자, 광부 조르바에 한한다. 주인공 `나'와 `조르바'그리고 그들이 터키의 압제를 벗어나 목적지로 둔 `터키'와 `크레타'섬의 대비는 많은 상징을 띤다. 주인공 `나'가 아폴론적 인생관을 지녔다면 조르바는 디오니소스적 인생관을 지닌 인물이다. 하늘에 소망을 두고 합리와 질서로 산 인물과 대지에 충실하며 비합리와 무질서를 지향한 삶 중 어느 것이 정답인지는 모른다. 다만 그 시대를 관장하는 기득권층 규범으로만 시시비비로 평가될 뿐이다. 터키라는 공간적 상징이 물질, 육체, 행동이라면 크레타는 정신, 영혼, 사색의 공간을 의미한다. 두 사람이 도달한 크레타 섬에서 한 사람은 자유롭게 살고 한 사람은 그의 삶을 관찰하며 자신이 지닌 확대경을 내려놓는 플롯이다.

“확대경으로 보면 물속에 벌레가 우글우글 거려요. 갈증을 참을 거예요? 아니면 확대경을 부수고 물을 마시겠소? 당신의 그 많은 책을 쌓아놓고 불이나 싸질러 버리시오. 그러면 그제야 인간이 되겠지!”

확대경을 부숴버리라는 조르바의 외침이 주인공의 가슴을 뚫고 우리에게 향한다. 우리 역시 얼마나 많은 확대경으로 진리를 평가해왔던가. 그 확대경에 몰매 맞은 영혼 또한 얼마인가.

니코스 카잔차키스가 강조한 `그리스인 조르바'는 영원한 자유인 조르바이다. 조르바를 만나 확대경을 내려놓고 물질의 세계로부터 가벼워진 주인공 `나'이기도 한 니코스카잔차키스는 그의 묘비명처럼 비로소 자유를 얻었다.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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