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을 걷다
기억을 걷다
  • 임현택 수필가
  • 승인 2020.05.21 1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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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임현택 수필가
임현택 수필가

 

산자락 시골마을, 온 산이 뿌옇다. 마치 산을 뒤덮은 운무 같다. 바람 따라 긴 꼬리를 연기처럼 흩날리며 온 세상을 점령한 송홧가루다. 아까시꽃이 몽글몽글 기지개를 피기 시작하면서 그간 잊고 있던 기억이 송홧가루처럼 피어오른다.

마을 언저리 아까시나무로 우거진 언덕배기에 막걸리애주가가 계셨다. 가을날의 툭 휘어진 억새처럼 힘없이 허리가 구부러진 고령의 자그마한 할머니. 흔하디 흔한 복지용구지팡이도 아닌 산신령지팡이와 흡사한 나무로 만든 지팡이를 언제나 짚고 다니시는 할머니다.

도로에서 어르신댁까지 오르려면 그다지 멀지는 않지만, 언덕인지라 숨이 턱까지 차오른다. 옛날 집을 겨우 실내만 현대식으로 개량한 야트막하고 아담한 집. 삐걱거리는 유리문을 열면 온통 마룻바닥엔 송홧가루가 누렇게 내려앉아 발걸음마다 흔적을 남겨놓는다.

할머닌 허리춤까지 바지를 올리지도 못해 언제나 꼬리뼈가 다 보일 정도다. 바짓가랑이는 땅바닥에 질질 끌려 흙과 송홧가루가 엉겨 붙어 엉망진창이다. 엉덩이가 훤히 다 보이는 바지를 아무리 끌어올려도 늘 제자리다. 그렇게 엉덩이를 내놓고 털썩 주저앉아 집에까지 오르는 자투리 공터에 갖가지 농작물을 심는다.

앉은뱅이 목욕의자를 끌고 다니시면서 철철이 가지, 토마토, 들깨, 상추는 물론 나뭇가지를 쭉쭉 세워 오이까지 심으셨다. 왜 그리 농작물에 애착을 갖는지. 노동의 대가는 혹독했다. 척척 갈라진 손등, 손가락은 관절로 마디마디가 툭툭 혹이 튀어나와 있고, 구부러진 허리처럼 손가락도 변형이 되어 있다.

관절로 변형된 뭉뚝한 손, 밤이면 앓는 소리가 문밖으로 새나갈까 신음도 속 시원히 내뱉지도 못했다는 할머니다. 삶이 뉘엿뉘엿 넘어가는 황혼 순간까지 속으로 아픔과 싸우셨을 터. 어쩜 손가락 마디마디마다 툭툭 튀어나온 관절은 자식들을 위한 희생, 무거운 삶의 무게를 속 울음으로 꼭꼭 삼킨 증표가 아닐까.

굵어진 손가락은 잘 펴지지도 않아 늘 아프다 하시면서 갖가지 모종을 심고 수확을 하시는 할머니. 그러고 보면 생전어머니도 그러하셨다. 울담 아래는 옥수수를 심었고 사이사이 호박을 심어 여름부터 호박잎과 애호박 그리고 늙은 호박까지 수확했다. 조금이라도 공터가 있음 상추, 열무라도 심어 밥상에 올리셨다. 자투리 공터에 어둠이 내릴 때쯤 아픈 허리를 툭툭 주먹으로 두드리며 일어나셔도 자식들은 당연하다 여겼고 고되다는 생각조차 하질 못했다.

할머니 새참은 막걸리다. 양은대접에 꿀렁꿀렁 화음에 맞춰 뽀글뽀글 방울을 일으키며 따라지는 막걸리는 언제나 먹음직스럽다. 막걸리를 따르는 내내 입안은 군침이 가득 고인다. 할머닌 그 어떤 선물보다 막걸리 두 병이면 그만이다. 혹여나 빈손이면 `망할 년 막걸리도 안 사 오면서 뭐 하러 와'타박하신다.

때문에 막걸리 봉지를 흔들며 언덕 아래부터 `할머니 막걸리 사왔어요.'소리 지르며 올라갔다. 그렇게 오르던 길에 섰다. 고요하다. 기억의 끈을 놓쳐버린 할머닌 어린아이가 되어 요양원으로 입소하셨다. 논어는 `나무는 고요하고자 하나 바람이 그치지! 않고, 자식은 봉양하고자 하나 부모는 기다려주지 않는다.'라 했는데 바람에 실려 온 향기가 오늘따라 유달리 애틋하게 안긴다.

그랬다. 고쟁이에 꼬깃꼬깃 간직한 쌈짓돈, 그마저도 손주들 손아귀에 꼭 쥐여주시던 거칠고 굵은 손마디, 우리네 어머니들은 자투리 공터에서 일을 하고 계셨던 것이 아니었다. 오랜 세월 오롯이 자식을 위해 희생만 하던 일들, 습관처럼 몸에 배어 있는 일 때문에 몸이 먼저 반응을 했던 것이다. 아까시꽃을 주렁주렁 매단 언덕배기, 봄날 같은 마음이 따스하게 다가오던 기억들 오늘은 속 빈 강정처럼 유독 차갑게 다가와 빈 여백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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