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지사지(易地思之)
역지사지(易地思之)
  • 김경수 시조시인
  • 승인 2020.05.18 1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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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김경수 시조시인
김경수 시조시인

 

어느 날 그녀의 유리어항이 사라졌다. 잠시 밖에 놓아두고 깜빡한 것이었다. 그 순간 그녀는 수철을 의심했다. 그 이유는 수철과의 다툼 때문이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그 언제가 수철이가 그녀에게 맡겨 두었던 물건을 한마디 말도 없이 모두 버렸다고 했다.

그 말을 들은 수철은 당혹스럽고 어이가 없었다. 어찌 보면 수철에게도 문제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물건을 맡겼으면 오래 두지 말았어야 했다. 그녀도 경솔했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렇다고 수철에게 실수를 인정하기는 싫었다. 발단은 그러했다.

수철과 그녀는 오랫동안 한 건물에서 나란히 작은 점포를 운영하며 살아가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수철에게 냉동보관이 요구되는 물건이 생겼다. 하지만 수철에겐 냉동고가 없어 보관하기 어려운 물건이었다. 어찌할까 망설이다 그녀에게 부탁하게 되었다. 다른 이웃도 있었지만, 그녀의 냉동고가 가까이에 있어 편히 사용할 수 있을 것 같아서였다. 다행히 그녀 또한 수철의 부탁을 별생각 없이 받아주었다. 그때부터 수철은 몇 차례에 걸쳐 아무런 거리낌 없이 자유롭게 그녀의 냉동실을 사용하였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부터 까마득히 잊은 채 지냈다.

그녀는 수철의 세입자였다. 그래서 그랬는지는 몰라도 수철의 부탁을 차마 거절하지 못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어쨌든 그들 사이가 아무리 친해 보이는 듯해도 그들의 입장은 각기 다를 수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그녀에게 그런 부탁을 한다는 것은 쉽게 생각할 일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수철은 감정이 앞서 그녀의 말을 곱씹으면 씹을수록 화가 되어 치밀어 올랐다. 수철은 그녀에게 미리 사전에 예고를 해줬더라면 하는 서운함을 토했다. 곧바로 그녀가 언제 맡긴 물건인 줄 아느냐며 오히려 수철에게 염치없다는 투로 불만을 쏘아붙였다.

하지만, 수철은 물건과 냉동고 주인은 엄연히 다른데 그녀가 임의대로 처리한 것에 대해 따지려고 하였다. 그렇지 않아도 종종 수철의 간섭에 대해 짜증스러웠던 그녀는 단도직입적으로 냉동고 주인은 그녀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누구에게 무엇을 따지려 하느냐고 했다. 갈수록 기세등등한 그녀의 태도에 수철은 감정이 고조되어 갔다. 드디어 그녀가 수철을 향해 건물주로서 귀에 거슬리는 소리를 서슴없이 외치며 그동안 세입자로서 쌓였던 유감을 터뜨렸다. 결국 그들의 싸움은 점점 뜨거워지고 끝이 날 줄을 몰랐다.

그 후 그들은 그런 일들로 어색해져 갔지만, 한편으로 수철은 그녀의 입장을 조금이나마 생각해 보았고 그녀 또한 냉동고 주인 행세를 한 것에 느낀 바가 있었다. 그런데 얼마 지나 누군가 어항을 갖고 나타났다. 그것이 어찌 된 영문인지 알 수 없었지만 수철과 그녀 사이는 시간이 파고들어 언제 다퉜느냐는 듯 바람처럼 사라졌다.

삶 속엔 사람과 사람이 얽혀진 관계로 갈등을 일으키는 요인이 많다. 그중에서도 그 입장이 수평적 관계보다는 수직적 관계의 양상이 전혀 다른 면모를 취하고 있다고 본다. 언제나 그들 사이는 친하게 웃고 있는듯하여도 껄끄러움이 존재할 수 있어서이다. 그 이유는 서로의 위치가 엄격히 달리 놓여 그 입장을 알 수가 없기 때문일 것이다. 아마 역지사지의 심정으로 한 번쯤 서로 바꿔 놓고 생각해 본다면 다소나마 상호존중의 의미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을는지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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