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기(復棋)
복기(復棋)
  • 양철기 교육심리박사·음성 원남초 교장
  • 승인 2020.05.14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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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학으로 보는 세상만사
양철기 교육심리박사·음성 원남초 교장
양철기 교육심리박사·음성 원남초 교장

 

어린 시절 TV를 통해 프로 바둑기사 둘이 연습 대국을 하고 복기하는 것을 본 적이 있다. 그야말로 경이로운 장면이었다. 한판의 대국을 끝내고 복기를 하면서 손가락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자신들이 놓았던 돌을 다시 놓았다. 각 승부처에서는 실제와는 다르게 돌을 놓고 시뮬레이션까지 해나가며 돌을 놓았다 쓸어 담기를 반복했다.



#복기와 암기

복기(復棋)는 한번 두고 난 바둑의 판국을 비평하기 위해 두었던 대로 다시 처음부터 놓아 보는 것을 말한다. 보통 한판 바둑 두는 수는 평균 400개로 복기를 하는 바둑기사는 400번의 착점을 모두 외우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도 자기와 상대방이 두는 순서까지 기억한다. 보통사람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그럼 프로 바둑기사는 천재일까.

기억은 다양한 방법을 통해 이루어진다. 숫자나 이름처럼 단순한 것을 기억하는 데는 분명 한계가 있다. 그런데 프로기사들 바둑을 하나의 알고리즘, 패턴으로 기억한다. 바둑의 정석(定石)은 수백 년 동안 많은 바둑 기사들이 승부를 겨루면서 검증한, 바뀔 가능성이 없는 패턴을 말한다. 아침에 일어나 양치를 할 때 왼손으로 할까 오른손으로 할까 생각하지 않고 평소 하던 대로 하듯이 프로 바둑기사들도 일단 정석 상황에 들어서면 뇌로 생각하기 이전에 본능적으로 손가락이 정석대로 움직인다. 이 패턴을 경험으로 축적된 구조화된 지식(organized knowledge) 또는 도식(Schema)이라 부르기도 한다.

프로 기사들이 복기할 수 있는 것은 대국을 할 때 한 수 한 수 모두 의미를 가지고 둔 돌들이기 때문에 가능하다. 따라서 첫수만 기억하면 나머지 수는 저절로 따라오게 되어 있다. 하지만 의미 없이 늘어놓은 바둑돌은 아무리 천재기사라 할지라도 복기가 불가능할 것이다. 필자와 같은 하수(下手)가 두는 바둑은 이창호 9단이 와도 복기가 어려울 것이다.



#100일 복기

복기의 핵심은 악수(惡手)를 되짚어보는 것이다. 자신의 실수와 오판을 복기하며 실패의 원인에 직면(confrontation)하는 것은 웬만한 강심장도 하기 힘든 일이다. 오죽하면 조훈현 9단도 `아마도 할 수 있다면 피하고 싶다. 자신의 치부를 정면으로 바라보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라며 복기의 고통을 토로했다.

`질 자신이 없다.'라던 이세돌 9단은 자신의 승리 비법은 철저한 복기였다고 했다. 또 그는 고통스럽지만 어제의 실패를 마주해야 다음 승리를 준비할 수 있다고 복기의 중요성을 이야기했다. 이창호 9단은 승리한 대국의 복기는 `이기는 습관'을 만들어 주고, 패배한 복기는 `이기는 준비'를 만들어 준다고 복기 예찬을 했다.

복기는 패자에게 상처를 헤집는 것과 같은 고통을 주지만 진정한 프로라면 복기를 거부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더 적극적으로 복기를 주도할 것이다. 복기는 대국 전체를 되돌아보는 반성의 시간이며, 유일하게 패자가 승자보다 더 많은 것을 거둘 수 있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지금 올해 2월부터 지금까지 거의 100일 동안 가보지 않은 길, 상상하기 어려웠던 길을 가고 있다. 80여 명의 학생이 있는 작은 시골학교에서도 수많은 의사결정과 시행착오 등이 눈에 보이게 또는 눈에 보이지 않게 진행됐다. 그리고 앞으로 얼마나 더 이 상황을 버텨내야 할지 모를 일이다. 하여 100일 복기를 차분히 해본다.

돌부처 이창호 9단은 `바둑에는 복기라는 훌륭한 교사가 있다.'라고 했다. 인생에도 복기라는 스승이 있다. 그러고 보니 오늘은 스승의 날, 비대면이 대세이니 은사님을 찾아뵙기 부담스럽다. 하여 오늘 `복기'라는 스승을 만나보는 것도 의미 있을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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