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조선에 대하여
기자조선에 대하여
  • 이창수 시인
  • 승인 2020.05.14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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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이창수 시인
이창수 시인

 

기자는 성이 자(子)고 이름이 서여(胥餘) 또는 수유(須臾)로 불리며 기원전 1182년에 멸망한 은나라 주왕의 백부이자 삼현 중 하나이고, 주왕에 의해 감옥에 갇히고 종으로 전락한다,

주나라 무왕이 기원전 1182년에 상(은)을 멸망시키고 기자를 석방하며 자기 휘하에 들어오기를 청하나 기자가 거절하니 무왕은 정치의 대법을 기자에게 묻는다, 기자는 만백성을 위해 《홍범(금간옥첩)》을 전해주고 무왕은 감사의 뜻으로 제후에 봉하고자 하였다.

기자는 “하늘이 이 도를 하나라 우임금에게 내렸고 또 나에게까지 전했는데. 내가 나라를 망하게 한 원수라는 감정만 앞세워 당신에게 전하지 않는다면 천하에 이 도를 전할 수 없기 때문에 전한 것이지 원수 밑에서 벼슬을 하려고 전한 것은 아니다”라고 하며 끝내 신하 되기를 거절하고 상투를 틀고 만이의 복장으로 미자의 송과 접한 조선의 빈 땅 서화에 망명한다.

기자를 조선에서는 수유라 했고 중국에서는 서여라 하는데 기자가 서화로 망명하는 시기를 전후해서 마한에 동명이인의 다른 서여가 자리를 옮겼다.

22세 단군 색불루의 조부 우현왕 휘하에 상장(上將) 서여(西餘)가 북박을 격파하고 자객을 보내 번한의 소정을 죽인 서여와, 또 20세 마한의 아들 서여가 있어 태행선맥 서북의 땅으로 피하여 거처를 옮기니, 마한이 가서 주와 군을 조사하고 열병 후 돌아왔다는 조선에 두 명의 서여는 그 행동으로 봐서 이름 중에 서의 글자가 달라도 북박을 치고 들어간 자리에 나라를 세워 자신의 거처를 옮기는 동일인으로 보인다.

그런데 기자가 상구에서 황하 남쪽 옛 서화로 족친과 제자를 이끌고 망명 은둔하여 중립을 지키니 25세 솔나단군이 사람을 보내 인사해도 사절했다는데. 그 기자가 대야발의 『단기고사』에서는 단군으로 둔갑 기자단군의 시조가 되어 42세에 1,097년간 조선을 통치했다고 한다,

이 <기자조선>을 『태백일사』 <삼한 관경본기>에 비추어 살펴보니 번한세가 30세 서우여의 가운데 우자를 빼서 서여로 만들어 기자단군1세로 하고 서우여 후손 38대의 번조선 왕과 외부인 물한을 추가하고 진짜 기자 후손의 마지막 번조선왕까지 6명 중 2명만 합하여 42세를 만들어 기자를 조선 단군으로 승진시킨 거 같다.

『단기고사』에는 간지와 연대 기록이 없고 전개되는 형식이 중국 사서를 꼭 닮았다, 우리 고유의 주체사서에는 간지가 있어 연대를 추적할 수 있고 인용 문구에 대한 저본을 제시하여 고증하는데 『단기고사』는 <전 단군조선> <후 단군조선> <기자조선> 으로 조선을 쪼개서 후단군 조선과 기자조선을 중복시켜 뒤죽박죽으로 만드는 악의적 왜곡의 표본으로 아무리 봐도 근거 없는 황당한 허구다.

중국 사가들의 휘치필체는 궁극적으로 자기네 역사도 소설로 끌고 간다. 역사는 사람을 저울질하고 잘 잘못을 재는 자와 저울이 있어야 하는데 감추고 빼고 부풀리고 거짓도 사실로 왜곡 기록하는 역사가 어찌 역사일 수 있겠는가.

망하는 나라를 두고 도망가는 신하도 충신으로 기록해 주는 거 보면 중국은 사람 재는 기준이 꽤나 헐렁한 거 같다, 그리고 천 년이 지난 역사도 판세를 바꾸어 주나라는 선진 대국으로, 조선은 후진 약소국으로 둔갑시키는 중국역사의 기후 풍토가 참으로 절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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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영삼 2021-01-15 16:52:46
우리나라 강단 또는 재야사학자 분들의 공통된 레파토리는
중국 역사적 기록중 한반도 관련 기록은 대부분이 조작 또는 허구라는겁니다.
급기야 사마천의 사기 또한 기자관련 기록에 대해서는 아예 대화의 문의 닫고
내 주장만 하겠다는 자세입니다.
저는 강단도 재야사학자도 아닙니다만... 누구의 말이 합리적이고 타당한가에 대한 기준 척도를
세우려우면 스스로가 공부를 해봐야겠다 생각이 들어 이것저것 역사문헌을 들춰보는 정도의
역사 애호가라 보시면 정확할거 같습니다.
사마천에 관해 백번양보해 그가 아무리 중화주의 빠져 한무제의 명을 받아 역사왜곡을 저질렀을것이다 생각해봐도 사기는 그의 부친과 자신의 자존심인것입니다.
훗날 부친의 뜻이 쓰레기로 치부되는(역사왜곡) 그 모욕을 사마천 자존심이 허락했을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