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기자 수필가
  • 승인 2020.05.14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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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김기자 수필가
김기자 수필가

 

어안이 벙벙하다. 전후 사정이야 어쨌든 통화 중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어버린 그의 태도에 몇 날을 헤매고야 만 것이다. 지인 사이에서 있었던 불협화음이 나에게까지 전파되었다고나 할까. 이유인즉 그의 편에 서서 두둔하지 않았던 것이 화근으로 짐작할 뿐이다. 그동안 까맣게 잊고 있다가 궁금하던 차 먼저 연락한 나는 눈치를 전혀 못 알아차린 둔한 사람이었음이 분명했다.

생각하고 또 생각해 보았다. 얼굴을 맞대고 속 시원하게 서로의 오해를 풀어보고 싶지만 접기로 했다. 괜한 구설수 때문에 마음 밭이 어수선했어도 안정을 찾으려 애쓰느라 며칠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른다. 그는 내 전화번호를 지웠다고까지 했다. 냉기 어린 그 말에 한 대 뒤통수를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상황으로 보아 좋았던 기억마저 지워버렸을 그와 달리 나는 추억들을 하나하나 나열해보기 시작했다. 사진첩에서 활짝 웃는 그가 내 옆에 있다.

꽃피는 계절이다. 낮은 자세로 보아야 할 곳에, 바늘만 한 잡초들도 모두 꽃을 피우고 있다. 하나같이 환한 얼굴로 하늘을 향한다. 그 모습에서 힘이라는 것을 발견했다. 저마다의 삶을 밀어올리는 힘에 대해 위대한 가치를 찾게 된 것이다. 그리고 생존의 가치를 더 깊게 바라보기 시작했다. 아무리 보잘것없는 미물 같아도 나름대로 소중하고 이유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기회였다. 자연의 이치 속에서 또 한 번의 엄숙함에 빠져들었다.

꽃이 피기 위해서는 토양이 중요하다. 하지만 햇볕과 바람이 없다면 불가능할뿐더러 고유의 아름다움도 빚어 내지 못한다. 바로 그 힘은 내면과 외면까지 여물게 하는 평정의 과정이기도 하다. 사람도 이처럼 여러 가지 환경과 부딪히는 조건에 의해 자기만의 색깔을 드러낸다. 참 예민한 부분이다. 보이지 않는 마음의 밀도로 인해 상처를 입기도 하며 훈훈한 느낌을 전달받을 수 있기에 언제나 타인과의 관계는 조심스럽다.

그동안은 참 수월하게 살아온 것 같다. 사람 사이가 복잡 미묘한 것도 나이 들어가며 알았으니 말해 무엇 하겠는가. 늙어가는 것이 아니라 익어가는 것이라는 노랫말처럼 지금 내 마음도 그 방향을 향하려 애쓸 뿐이다. 하지만 익어가기 위해 겪는 일들이 그리 쉽지는 않다. 자꾸만 고개를 드는 여러 가지 감정들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조롱하는 기분에 빠질 때가 있기 때문이다. 무수한 시행착오일까. 그런 상황을 알게 모르게 겪어가는 현재가 결국은 완전치 못한 나를 조금이나마 익어가도록 하는 모습이 아닐 런지.

노하기를 더디 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다고 했다.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낫다는 잠언이 오늘따라 심중에 파고든다. 예전 같으면 끝내 서운한 마음을 어떻게든 표현했을 것이다. 이번 기회에 힘을 기르기로 단단히 작정했다. 무거운 물건을 옮기는 일도 힘이 필요한 것처럼 마찬가지 마음의 짐을 내려놓는 힘도 중요한 것을 알게 된 기회였다.

시간이 지나면서 어느 정도 격한 파장이 잦아들었다. 생의 절반을 훌쩍 보낸 가을이라는 고개에 이르러 바쁜 걸음으로 가고 있다. 겨울이 머잖아 다가올 터 아옹다옹 살고 싶지가 않다. 원치 않게 오늘이 무거웠다면 가벼워지도록 꾸준히 노력하고자 한다. 그 힘의 모양은 따뜻하고도 넉넉한 사랑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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