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천히 새살이 돋듯이
천천히 새살이 돋듯이
  • 추주연 청주교육지원청
  • 승인 2020.05.13 1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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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즈 포럼
추주연 청주교육지원청
추주연 청주교육지원청

 

3월 근무처를 옮긴 후부터 연이은 야근 행보였는데 오후에 사무실로 배달된 농산물 꾸러미를 받아들고 오늘만큼은 칼퇴근 하리라 굳게 마음먹었다. 코로나19 여파로 판로가 막힌 학교급식 농가를 조금이라도 돕고자 주문한 것이다. 상자 안에는 잘 손질된 양파와 감자, 대파와 표고버섯, 얼갈이배추, 마늘에 유정란까지 정갈하게 담겨 있다.

집에 들어서자마자 가방을 던져놓고는 뚝배기에 된장을 풀고 멸치와 다시마를 넣어 끓이기 시작했다. 오랜만에 구수한 된장찌개 끓일 생각에 재료를 손질하는 손이 분주해진다. 가지런히 팩에 담긴 동글한 양파부터 썰기 시작했다. 어째 양파가 좀 작은 듯 보여 한 개 더 꺼내 썰어나가던 중 `앗' 하는 외마디 소리와 함께 손을 감싸 쥐었다. 한동안 무심하게 방치되어 무뎌진 칼이 엇나가 손을 베인 것이다. 차마 상처를 들여다볼 엄두를 내지 못하고 약상자로 달려가 일회용 밴드로 손가락을 감쌌다. 밴드 사이로 계속 피가 새어나온다. 밴드를 여러 겹 둘러싸고서야 피가 멈추었다.

하룻밤을 지냈는데 밴드로 칭칭 감아놓은 손가락의 통증이 점점 더 심해졌다. 금세 아물겠지 했던 마음이 불안해진다. 이튿날 밤, 잠을 이루지 못할 정도로 아파 결국 다음날 병원을 찾았다. 당장 꿰매야 한다는 의사선생님 말씀에 미련스럽게 참았구나 싶다. 앉은 자리에서 부분마취를 하고 베인 살을 꿰맸다.

진짜 시련은 이때부터였다. 손가락 하나를 붕대로 감아놓았을 뿐인데 일상의 불편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씻는 것도 힘들고 컴퓨터로 업무를 보는 것도, 집안일이며 요리를 하는 것도 쉽지 않다.

손이 불편한 하루가 어찌나 긴지…. 두 달 같은 2주일이 지나 드디어 붕대를 푸는 날이다. 오랜만에 본 손가락은 상처를 둘러싼 피부가 허옇게 부풀어 몰골이 말이 아니다. 퉁퉁 부은 손가락을 쳐다보며 약 처방을 기다리는데 옆자리 나이 지긋한 아주머니가 말을 건넨다.

“저런, 여자 손을 그렇게 상처를 내서 어쩐대? 자고로 여자는 손이 고와야 하는 법인데.”

그저 딸 같은 이웃에게 건네는 따뜻한 마음인 것을 알면서도 씁쓸한 웃음이 난다.

불현듯 스무 살 무렵 아르바이트로 잠깐 다녔던 회사에서 상사가 “아니, 여자 손이 왜 그렇게 거칠어? 여자는 손 관리를 잘해야 한다구.”라고 말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알 수 없는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었다. 이유도 모른 채 뭔가 잘못한 것만 같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불쾌한 마음이 커졌지만 혼자 마음에 담아두고 지나갈 수밖에 없었다. 그 후로도 사는 내내 여자는 이래야 한다, 남자는 저래야 한다는 말을 불쑥 듣는다.

살갑고 다정한 마음에 대해 예민한 반응이라 할지 모르지만 오늘은 용기를 내본다. “에이, 여자라서 손이 고와야 하겠어요? 누구라도 손이 고우면 좋죠. 염려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아, 그런가? 맞는 말이네.” 호탕하게 웃는 아주머니의 모습이 친근하다.

그냥 웃고 넘어갈 수 있는 이야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마디씩 천천히 바꾸어가는 세상이다. 베인 상처 위로 천천히 새살이 돋듯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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