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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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경순 수필가
  • 승인 2020.05.12 2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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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문앞에서
김경순 수필가
김경순 수필가

 

문이 닫혔다. 문은 안에서도 밖에서 열 수 없게 고장이 났다. 화가의 화실에는 무엇 하나 부족함이 없이 갖추어져 있었지만 나갈 수 없음에 조급증이 발동한 것이다. 단, 하룻밤만 견디면 된다. 하지만, 그에게 하룻밤을 기다린다는 것은 영영 오지 않을 내일을 기다리는 것과 같았다. 평소에는 며칠씩도 바깥에 나오지 않고 그림만 주구장창 그려 댔다. 그런데 지금 그는 문을 열 수 없음에, 아니 지금 문을 열고 나갈 수 없다는 생각에 불안을 넘어 공포에 떨고 있다.

이범선의 <고장 난 문>에서 화가는 자신이 문을 열고 나갈 수 없음에 절망을 한다. 결국 그는 아침도 보지 못하고 죽음을 맞는다. 이 소설이 나온 것은 70년대 후반이었다. 당시만 해도 이 소설을 읽은 많은 독자는 화가의 죽음이 단지 참을성이 부족한 어느 화가의 아이러니한 죽음 정도로 치부했을지도 모르겠다. 하룻밤만 참으면 읍내의 목수가 와서 문을 고쳐 줄 텐데 하고 말이다. 지금이야 누가 봐도 화가의 죽음은 폐소공포증이란 것을 알 수 있다. 엘리베이터, 터널, 비행기 등의 닫힌 공간에 있는 것이 두려워 비명을 지르거나 불안감을 호소하는 정신병증의 하나인 불안 장애를 겪고 마침내 죽음을 맞이했을 것으로 보인다.

과거 우리 선조의 생활모습에서는 폐소공포증과 같은 병증은 흔하지 않았을 것이다. 탁 트인 논과 밭을 앞에 두고 집 주위에는 산들이 있어 사람들을 가두어 놓지 않았다. 방문도 걸쇠로 그저 툭 걸쳐 놓았을 뿐 지금처럼 복잡한 열쇠라는 것이 없었다. 내가 어렸을 때 우리 집은 단칸방의 작은 슬레이트집이었다. 부모님은 한 번도 방문을 걸어 잠가 놓은 적이 없었다. 옆집에 숟가락이 몇 개인지, 밥그릇이 몇 개인지 까지 동네 사람이면 모두 알 정도인데 굳이 잠글 필요가 없었다. 더구나 우리 집은 동네에서 몇 번째 안가는 가난한 집이었으니 당연한 일이었을 터이다.

현대사회에서 제일 많은 병은 아마도 정신병증일 것이다. 예술의 도시라 하는 파리에서 정신과 병원이 제일 많다는 것도 그것을 증명해 준다. 어디 프랑스 파리뿐일까. 요즘 우리나라도 정신병증을 앓지 않는 사람이 앓는 사람보다 적다라는 말이 있을 만큼 불안한 사회라고 할 수 있다. 도시는 온통 높고 복잡한 밀폐 공간뿐이고 직장에서 학교에서 살아남기 위해 치열하게 하루하루를 견디며 살아간다. 그러니 어디 온전히 삶을 즐기며 살 수가 있을까. 게다가 자연을 접하기도 쉬운 일이 아니다. 휴일이면 사람들은 관광지로 떠나기 바쁘다. 그런데 요즘은 전 세계적 대재앙인 코로나19로 모든 나라가 빗장을 걸고 우리나라도 대부분의 행사가 중지되어 사람들이 갈 곳이 없어졌다.

사람은 사회 속에서 사람들과의 관계로 얽히어 살아간다. 나쁜 관계도 좋은 관계도 말이다. 그동안 우리는 잘 참으며 견디어 왔다. 단단한 둑도 작은 구멍 하나가 무너뜨리는 경우가 있다. 며칠 전 이태원 클럽에서의 코로나 확진자가 나오며 다시 증가추세로 이어지고 있다. 문밖 세상이 궁금하고 그리운 것은 이해가 간다. 하지만 지금은 잠시 참아야 한다. 자신과 타인을 위해서 말이다.

만약 <고장 난 문>의 화가가 심부름을 해주는 `만덕'이와 밤새 이야기라도 했으면 살 수 있지 않았을까? 자신의 세상에서 그 누구와도 소통하지 않은 화가였다. 화가는 그간 자신의 세상인 `문안'에서만 있다가 소통의 통로인 `문밖'을 나갈 수 없음에 그토록 불안하고 공포감을 느꼈을 것이다. 지금은 모두가 조심스러운 때다. 부디 마음껏 `문밖'세상을 자유롭게 누리기 위해서라도 우리 서로가 `문안'에서의 소통을 즐기는 것은 어떨까. 서로의 안부를 불어가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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