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월에 생각하는 사람
오월에 생각하는 사람
  • 신미선 수필가
  • 승인 2020.05.11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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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신미선 수필가
신미선 수필가

 

유년 시절을 시골에서 지낸 나는 무료한 일상이 가장 싫었다. 부모님은 언제나 논으로 밭으로 농사일에 묻혀 사셨고, 언니와 오빠는 늘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느라 나의 존재를 잊은 듯했다. 텔레비전과 라디오가 친구 노릇을 대신하기도 했지만 그것도 잠깐뿐이었다.

공허한 시간이 길어질 때 우연히 책 읽는 재미를 알게 되었다. 무료한 일상을 달래주는 데에는 독서만큼 좋은 벗도 없었다. 가족 대부분이 일터로, 동네 공터로 놀러 나가면 햇살이 내리는 마루 끝에 앉아 책을 읽었다. 책을 읽는 그 순간만큼은 내가 늘 주인공이었다. 여러 사람의 삶을 단편적으로 산다는 것 또한 매력이었다. 단편소설부터 한국문학전집, 세계명작집 등 책은 열다섯 나의 사춘기 시절까지도 무난하게 잘 지나게 해 준 일등공신이었다.

문제는 아무 때나 장소를 가리지 않고 책을 본다는 것이었다. 노트필기장을 빼먹어도 그날 읽을 책 한 권은 절대 잊지 않고 가방에 넣고 다녔다. 수업시간 50분이 끝나고 10분 휴식 시간이면 다른 친구들은 엎드려 잠을 자거나 친구들과 수다를 떠느라 시끄러워도 나는 책을 꺼내 읽었다. 소설의 이야기가 위기를 넘어 절정에 도달할 즈음 수업종이 울리면 마음이 조급해져 안달이 나기도 했다.

어느 한 날 결국 일이 터졌다. 무섭기로 소문난 과학수업 시간에 몰래 소설책을 책상 밑 무릎 위에 올려놓고 읽다가 선생님께 들킨 것이다. 지난밤 친구에게 어렵게 빌린 소설책 한 권을 오늘까지 모두 읽고 돌려주기로 했건만 마저 다 읽지 못한 터였다. 돌려주어야 할 시간은 점점 앞으로 다가오는데 완독하지 못한 아쉬움이 조바심으로 나타났다. 책 속에 빠져들기 시작하니 선생님께서 바로 옆에 와 계신 것도 몰랐다.

그날 나는 선생님께 읽던 책을 뺏기고 다음 날 아침까지 반성문 한 장을 써오라는 벌칙까지 받았다. 책을 빌린 친구에게는 똑같은 책으로 사 놓으라는 엄포를 들어야 했고 남동생이 학교에서 있었던 일을 고자질하는 바람에 그날 저녁 엄마에게 눈물이 쏙 빠지도록 혼이 났다. 속이 상할 대로 상해 저녁밥도 거른 채 반성문을 쓰다 책상에 엎드려 그대로 잠이 들었다.

주말 오후 빼앗긴 책과 똑같은 책을 사러 시내 서점을 갔다. 그런데 하필 그곳에서 선생님과 맞닥뜨렸다. 피할 수 있으면 피하고 싶은데 선생님은 어느새 나를 알아보고 내 이름까지 불러주셨다. 주눅이 들어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책만 쳐다보고 있는 나에게 선생님이 말씀하셨다.

“책은 돌려줄 것이니 따로 사지 않아도 된다. 보고 싶은 다른 책은 없니?”

그날 나는 선생님께 책 한 권을 선물로 받아들고 집으로 돌아왔다. 아이러니하게도 반성문을 읽어보니 진정성 있게 잘 썼다는 칭찬의 한마디도 들었다. 지금도 그 책들은 나의 책장에 꽂혀져 해마다 오월이면 그분을 떠올리게 한다. 하루에도 몇 장씩 들어오는 반성문 중의 한 장이었을 테지만 선생님은 세심하게 읽어내려 어린 제자의 마음을 살폈을 것이다. 책 한 권을 사 주시며 책과 가까이하는 삶을 이어가라 강조하셨던 그분이야말로 스승으로서 제자를 깊이 아우르는 힘이었다. 나 역시도 아이들을 가르치며 수직적 자세가 아닌 수평적 대화를 잊지 않는다. 그 시절 선생님께서 내게 그러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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