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인한 4월 뒤에는 언제나 눈부신 5월이 온다
잔인한 4월 뒤에는 언제나 눈부신 5월이 온다
  • 이은일 수필가
  • 승인 2020.05.05 20:1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生의 한가운데
이은일 수필가
이은일 수필가

 

달포 전 근질거리던 심장이 빛을 향해 나아가기 시작했다. 처음 가 보는 길이지만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할지 운명처럼 알 수 있었다. 나는 네덜란드의 기품있는 혈통을 이어받은 명품 튤립 `레드파워'다. 꽃말이 영원한 사랑의 고백인데, 선남선녀의 사랑이 이루어지게 하는 일이 나의 임무이자 꿈이다. 정열의 붉은 튤립꽃 앞에서 서약한 사랑은 영원히 변치 않는다고들 한다.

쏟아지는 햇빛을 온몸으로 받으며 매일 하늘로 키를 키웠다. 안으로 자꾸 단단해지던 몸통에서 어느 날 초록 봉우리가 나오고 점점 붉어지며 부풀더니 드디어 컵처럼 봉긋해졌다. 준비가 끝난 것이다. 당당하게 임무를 완성할 때가 왔다. 오늘을 얼마나 그려 왔던가. 햇빛 한줄기 볼 수 없는 춥고 어두운 땅속에서 내가 굳건히 버틸 수 있었던 것은 날마다 이 순간을 상상했기 때문이었다. 이 설렘으로 가득 찬 4월을 왜 사람들은 잔인한 달이라 부르는 건지 도무지 이유를 모르겠다.

아침 일찍부터 부산을 떨었다. 새파란 하늘을 향해 힘껏 가슴을 열어젖히고 우아하게 펼쳐진 옷자락 사이로 허리를 곧게 세웠다. 꿈을 이루는 날이니까 실수가 있으면 안 된다. 이슬을 머금은 붉은 입술은 햇빛에 반짝이고 왕관처럼 품격있는 얼굴과 가늘지만 강인한 몸, 그 몸을 감싸며 엇갈려 올라오는 넓은 바소꼴 모양의 원피스 자락은 어느 때보다 우아하다. 완벽해. 고혹적인 나의 자태 앞에서 실패할 사랑은 아마 없을 것이다.

사람들 소리가 가까워진다. 내 심장이 터질 것 같다. 갑자기 가슴에 극심한 통증을 느끼며 순간 정신을 잃었다. 그리고 더는 아무것도 생각이 나지 않는다. 모든 것이 완벽했는데…….

이상은 얼마 전, 태안 튤립축제장에서 활짝 핀 튤립 꽃송이를 일부러 따버리는 장면을 뉴스에서 보고 써본 글이다. 사회적 거리 두기가 절실한 때에 행여라도 꽃 보러 오는 사람들이 있을까 해서인 줄 알았지만, 애써 피어난 보람도 없이 무참히 꺾여지는 꽃송이가 너무 안타까웠다.

요즘은 누구라고 할 것 없이 힘겨운 세월을 살아내고 있다. T.S.엘리엇의 시 <황무지>의 첫 구절처럼 우리에게 `4월은 가장 잔인한 달'이었다. 장기간 계속된 경제생활의 위축으로 사람들은 생계를 위협받을 만큼 힘든 상황이다. 끝을 몰라 아무것도 기약할 수 없는 불안한 시간의 거듭되는 연장, 무엇보다 소통의 부재로 인한 무기력하고 약해진 우리의 모습 때문에 우울했다.

하지만 잔인한 4월이 역설적인 표현이라는 해석도 있다. 척박한 황무지에서도 끝내는 꽃을 피워내는 라일락을 보면서 시인은 잔인하리만치 아름다운 생명력을 느끼지 않았을까? 힘든 상황에 가려져 보지 못했을 뿐, 우리 안에도 강인한 생명력은 이어지고 있었다. 함께 극복하려는 각계각층의 노력과 희생의 손길로 비상시국은 이제 안정화 단계에 접어들었고 생활 속 거리 두기로의 전환을 앞두고 있기 때문이다.

잔인한 4월은 가고 이제 눈부신 5월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