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변화
작은 변화
  • 안승현 청주문화재단 문화산업1팀장
  • 승인 2020.05.05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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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주알 고주알
미주알 고주알
미주알 고주알

 

어두운 밤하늘에 완벽한 반달이 서쪽에 자리하고 있는 시간. 연휴의 시작을 어떻게 할까 고민하는 사이 가로등은 꺼지고 푸르스름한 기운이 공기 사이를 채운다. 늘 그렇듯 하루의 시작은 주변 새들의 몫이다. 여느 때와 다른 것은 새끼를 지키려는 고양이를 향해 공격하는 까치 부부의 격양된 지저귐이 상쾌한 알람과 분주한 알람으로 뒤섞인다. 그 사이 차례차례 순서를 지키며 작은 새들은 물로 목욕하고, 고양이들은 목을 축인다.

대문을 열어젖힌다. 대문이라 봐야 허리도 안 되는 나지막한 철로 된 틀이지만 문을 열어 많은 것을 맞이할 준비를 한다. 하루의 시작은 한 주간 쌓아 두었던 집 둘레 도로 청소다. 도로를 사이에 두고 아름드리 느티나무가 싹을 틔우며 묵은 낙엽을 떨구는 사이, 도로 주변으로 각종 쓰레기가 쌓인다.

요즘은 전에 없던 마스크가 갈변한 낙엽에 색을 더한다. 긴 시간 비질 끝에 제법 많은 양이 모였다. 종량제 봉투에 다 넣자니 족히 100리터는 될 듯하다. 하여 일일이 쓰레기와 낙엽을 분리했다. 담배꽁초 50여개, 마스크 6장, 종이컵 등등 쓰레기 종류가 다양하다. 1주일 사이에 모인 양이다. 갑자기 더워진 날씨 탓인지, 이래저래 제법 열이 난다. 매일 매일 쓰레받기 하나면 되던 쓰레기양이 제법 불어났다.

움틀 것 같지 않던 둥구나무가 어느새 작년에 달았던 나뭇잎을 모두 떨어냈다. 바람이 불어서도 그리했겠지만, 지난해 미쳐 떨켜가 제 역할을 못한 채 덜떨어진 녀석을 움이 트면서 밀어낸 것이다. 유독 동쪽으로 난 가지에 많았는데 드디어 모든 잎을 떨어냈다. 줄탁동시라는 말이 어울릴 만한 상황. 묵은 갈잎은 신록이 되었다. 미세한 세포 끝에 달린 잎 하나하나의 변화는 오랜 시간 뿌리에서 물을 올리고 나뭇가지 끝으로 변화를 이뤄낸 장관이다. 작은 바람에도 늘 부드럽게 너울거리며 반기고, 시간을 더해 가며 몸집을 키워가는 꽤 듬직하고 대견한 녀석. 요즘은 힘들게 올린 여린 순이 떨어질 법한데도 온갖 새들을 불러들이고 품어주는 녀석이 되었다.

지난 늦은 가을에 뿌렸어야 할 씨앗을 해를 넘길 수 없어 늦은 봄이지만 풀과의 싸움을 각오하고 땅에 흩뿌리고 살포시 흙을 덮어 주었다. 오랜 경험에서 나오는 예상은 빗나가는 법이 없는 법, 온갖 풀씨들이 뿌린 씨앗보다 먼저 움트기 시작하더니 밭을 만든다. 너무나도 푸른 풀밭, 빼곡히 뿌리를 내려 속아 줄 수도 없을 만큼 밀식이 되더니 하루가 다르게 자란다. 나는 분명 뿌리지 않았는데 누가 어느새 뿌리고 갔는지 도무지 알 수 없는 상황이다. 말 그대로 신록이다. 이 상황에서는 올해 도라지와 더덕순은 보지 못할 것이 분명. 형체도 없는 풀씨는 늘 그렇듯 인정하고도 부족함이 없는 대단한 녀석들이다.

겨우내 묵었던 시간은 아직도 변화를 거듭하고 있다. 보이지 않는 반복이 거듭되면서 이제 제법 큰 존재임을 과시하고 있다. 작은 변화, 일어날 것 같지 않은 일들을 받아들이며 시간을 만들어낸다.

그동안 해결하지 못하고 벼르던 일이 하나 있었다. 어릴 적 늘 듣고 자랐던 안덕벌 둥구나뭇집을 위해 둥구나무를 심었다. 그것도 씨앗을 발아시켜 갓 키운 1년생 팽나무 모종을, 커다란 나무를 사 심을까 생각을 했지만 오랜 고민 끝에 실생을 선택했다.

온갖 감당하기 어려운 시간 속에서 50여년이 넘게 터를 지켰고, 제일 좋아하고 잘할 수 있으며, 내 가족과 내 삶의 전부였던 분야에서 30여년을 넘게 일을 했지만, 전공과 무관한 일을 해야만 하는 상황에 일이라는 숫자를 택했다. 물을 빨아들일 수도 없는 뿌리와 햇빛을 받아들일 만한 잎도 없는 보잘것없는 회초리 같은 팽나무, 이제 작은 변화를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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